"한국에서 왔습네까?" 1991년 2월 중국 난징대(南京大) 앞에서 서성이던 대학생들 등 뒤로 북한 유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학생들은 경북대 학생회 간부들로 정부 모 기관에서 주최한 선진지 견학차 중국을 방문 중이었다. 복학생이었던 필자도 이들과 함께 9박 10일 과정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1989년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비롯된 공안정국이 서슬 퍼런 당시에는 북한 유학생을 만난다는 자체가 불법(?)이었다. 두렵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우리들은 북한 유학생과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날 짧디짧았던 남북의 만남으로 필자는 여행 내내 기관원(?)의 감시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귀국하면 큰일을 당할 거라는 엄포 때문에 잠들지 못하는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1991년 유난히도 추웠던 중국의 겨울처럼 남북통일은 아직도 멀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데모하러 왔지?" "아뇨, 통일운동 하러 왔어요." 1990년 8월 15일 서울 연세대에서 친구 따라 상경 집회에 참석했던 필자는 귀갓길에 연행되어 하룻밤을 경찰서에서 지내야만 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는 1990년 8월 13일 판문점에서 남북해외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진행하는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 연세대로 집결했다. 대표단은 8월 15일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대표단의 판문점행은 무산되었다. 1990년 무더웠던 여름, 통일은 여전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차디찬 경찰서 유치장에서 꾼 하룻밤의 꿈이었다.
"대구는 왜 그리 보수적입네까?" 북한 인터넷 매체인 '우리민족끼리' 기자가 다가오면서 쓴소리를 내뱉었다. 필자는 2006년 11월 29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 언론인 통일토론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분단된 지 61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남북 언론인 통일토론회라 통일의 물꼬를 트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당시 한국기자협회보의 보도에서처럼 북의 핵실험 강행으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열린 토론회는 남북 언론인 교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북한 기자들은 한결같이 남측 언론에 대한 북측의 불신이 깊다고 얘기했다. 북측 관계자들은 "남측 언론 보도가 너무 편파적이다. 반북 기사가 너무 많다"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2006년 초겨울 금강산에서의 통일은 좀 더 가까이 왔지만,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통일과 관련해 많은 경험을 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 뚜렷이 아로새겨진 몇 가지 기억이다. 남북통일은 필자의 학창 시절에는 포스터표어 대회와 글짓기 대회에서만 쓰던 단어였다. 늑대 탈을 쓴 괴뢰군이 나오는 만화영화 '똘이장군'을 보면서 배운 것은 북한은 때려잡아야 하는 원흉이라는 왜곡된 인식이었다.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가 온 때도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휴전 상태'라고 가르쳤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표어를 썼지만 동시에 북한은 빨갱이의 나라라고 배웠다. 가슴으로는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 통일이고 북한이었다.
2018년 봄, 한반도와 7천500만 한민족 전체는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전환점에 섰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남북 정상회담은 신기루였다. 하지만 남북 정상과 국민의 마음이 합쳐지면서 꿈은 현실이 되었다. 판문점 도보다리를 걷는 두 정상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고 판문점 선언을 함께 발표하는 모습에서 평화의 새로운 시작을 느꼈다.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곧 열릴 북미 정상회담이 우리 민족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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