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발굴 아직 안 끝났다, 주택부지서 4∼6세기 신라고분 34기 쏟아져

입력 2018-05-09 16:36:01

경북 경주 탑동 주택부지에서 4∼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34기가 나왔다. 연합뉴스
경북 경주 탑동 주택부지에서 4∼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34기가 나왔다. 연합뉴스

경북 경주 탑동 주택부지에서 4∼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34기가 나왔다.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팀은 경주 탑동 6-1번지와 6-6번지의 면적 1천336㎡ 부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신라 전성기에 만든 목곽묘(木槨墓·덧널무덤) 8기,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돌무지덧널무덤) 18기,석곽묘(石槨墓·돌덧널무덤) 4기,옹관묘(甕棺墓·독무덤) 4기를 찾아냈다고 9일 밝혔다.

목곽묘 가운데는 6-1번지 3호 목곽묘에서 많은 부장품이 나왔다.이 무덤은 동쪽에 주곽(主槨·으뜸덧널),서쪽에 부곽(副槨·딸린덧널)을 마련했다.

주곽에서는 허리에 숫돌을 찬 무덤 주인공 머리 부근에서 토기들이 발견됐고,발 쪽에서는 비늘 갑옷과 화살촉이 출토됐다.내부에서는 철창과 철도끼도 나왔다.

주곽보다 조금 높게 만든 부곽에는 항아리와 등자 조각,운주(雲珠·말띠꾸미개) 같은 마구(馬具)를 묻었다.

이 무덤과 약 5m 떨어진 6-1번지 4호 목곽묘에서는 굽다리접시,목 긴 항아리 등 신라 전기 양식으로 알려진 토기가 나왔다.

조사단은 토기 양식 등을 근거로 경주 황오동 월성로 고분군 출토품과 비교해 목곽묘 조성 시기를 4세기 중반∼5세기 초반으로 추정했다.

5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는 적석목곽묘에서는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이 달린 굵은고리 귀걸이 한 쌍을 비롯해 둥근 옥이 달린 목걸이,은제 팔찌,환두대도(環頭大刀·고리자루큰칼)가 출토됐다.

조사단은 "적석목곽묘와 석곽묘는 2∼3개 무덤을 나란히 배치하기도 했다"며 "혈연이나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동일한 묘역에 매장한 문화를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국비 지원으로 진행된 이번 조사에서는 신라고분 외에도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목관묘와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우물 등이 중첩해 나타났다.

신라 무덤이 무더기로 확인된 탑동 일대는 신라 왕성인 월성과 왕릉급 무덤이 모인 대릉원에서 보면 남천(南川) 건너편 지역으로,남산에서 경주평야로 나아가는 길목이다.

지난 2010년 기원전 1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수장급 인물의 목관묘(木棺墓·널무덤)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이전까지는 문헌에 기록된 신라 건국 시기 즈음해 조성된 유력 지배자 무덤이 조양동과 사라리 같은 경주 외곽에서만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후 탑동에서는 이번 조사 성과를 포함해 기원 전후 목관묘 3기와 4∼6세기 신라 무덤 80여 기가 나왔다.

노재민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팀장은 "탑동 일원에서 원삼국시대부터 오랫동안 대규모로 무덤을 조성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며 "탑동에서 그동안 나오지 않았던 4세기 무덤을 발견한 것이 성과로,6월까지 조사를 계속할 것"이라고말했다.

신라고고학을 전공한 차순철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은 "탑동에서 4세기 목곽묘 여러 개가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며 "근처에 박혁거세와 신라 초기 왕들무덤이라는 오릉이 있다는 점에서 신라가 초기에는 이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하다 나중에 남천 너머로 중심지를 이동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차 단장은 이어 "탑동에서 조금 더 조사를 진행한다면 신라 초기 역사를 구명하는 유적이 나올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대규모 고분군이 확인된 탑동 주변 일대에는 오릉 말고도 박혁거세 탄강지인 나정과 그가 처음 궁궐을 세웠다는 창림사터를 비롯해 신라 건국과 관련된 유적이 밀집한다는 점에서 향후 이 일대는 발굴성과에 따라 신라 건국의 열쇠를 품은 곳이 될 수 있을 전망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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