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조폭만도 못하다

입력 2018-04-27 00:05:00 수정 2018-05-26 22:43:13

탕 안의 욕자(浴者)들은 모두가 평등하다. 물 위에 머리만 빼꼼히 내고 있어 서열이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이자 구름 위 달가는 나그네다. 사회적 지위와 계급, 부의 적고 많음은 옷장 안에 갇혔기 때문이다. 또 내가 너를 모르듯 너도 나를 모른다.

탕 안의 절대적 평등도 한 뼘의 계급은 허용한다. 세신사(때밀이 아저씨)를 부르는 벨을 누르면 그때부터는 쩍벌남이 된다. '세신' 밟고 '구두 콜~'까지 외치면 목에도 깁스를 한다. 탕 안의 부르주아다. 이들에겐 TV 채널을 마음대로 돌리는 약간의 갑질도 허용된다.

물론 슈퍼 계층이 있긴 있다. 등판에 탱화라도 그려져 있는 욕자들은 '건들지 마시오'다. 이들 앞에선 시선을 땅으로 꽂아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드러나는 슈퍼 갑일지언정 '갑질'은 하지 않는 님(?)들이 많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갑질로 위기를 맞고 있다. 막내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여객마케팅부 전무의 '물벼락 갑질'이 발단이 됐지만 어머니 이명희 씨의 또 다른 갑질 폭행 의혹이 잇따르면서 여론이 악화일로다. 외국 언론들도 다투어 갑질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돌아온 '땅콩 분노: 또 다른 대한항공 임원이 곤란에 처했다'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뉴욕타임스는 조현민 사건을 보도하며 '갑질'이라는 단어를 번역 없이 'gapjil'로 표기했다. 그러면서 오너(owner) 자녀란 특별한 지위가 안하무인의 후진적 행위를 불렀다고 분석했다.

한낱 개인의 갑질에 대한민국의 국격이 크게 훼손당했다.

조씨 일가가 해외 각지에서 사들인 명품은 법령에 정해진 절차를 무시하고 '프리패스'해온 사실도 밝혀졌다. 꼼꼼한 형사책임 추궁이 필요한 부분이다.

물벼락 갑질과 폭언, 욕설, 탈세 등 오너가의 일탈에 대한항공의 브랜드 가치는 크게 추락하고 있다. 브랜드 가치 평가회사인 브랜드스탁에 따르면 소비자 평가를 토대로 이뤄지는 브랜드 증권거래소에서 대한항공의 주가는 24일 종가 기준으로 47만3천원을 기록했다. 주가는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이 알려진 지난 16일 이후 줄곧 하강 곡선을 보이다 6거래일 만에 7.8%나 급락했다.

반면 경쟁사인 아시아나항공은 같은 기간 연일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브랜드 주가가 40만4천원에서 47만원까지 16.3%나 올랐다. 이미 브랜드 주가가 거의 같은 수준이 된 데다 추후 소비자 조사지수가 반영되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브랜드 평가는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대한항공은 2014년 12월까지 단 한 번도 항공사 부문에서 브랜드 가치 1위를 내준 적이 없다. 그러나 조현아 씨의 '땅콩 회항' 사태로 인해 2015년 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1년 이상 아시아나항공에 뒤지고 말았다.

갑질의 대가치고는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국민적 공분을 감안한다면 오너 일가를 내쫓아도 모자랄 판이다. '갑질'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이 천부인권설을 주창했듯 사라져야 할 악습이자 적폐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갑질 공화국'이란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돈이 조금 더 많다고, 직위가 약간 높다고, 얼굴이 알려져 있다고, 정치권력이 있다고…갖은 갑질 사유가 따라붙는다.

직무상 '지위고하'는 있지만 만인은 인권 앞에 평등하며 벌거숭이다. 모두가 평등한 욕탕 안의 욕자일 뿐이다. 물벼락을 맞을 일도, 땅콩으로 비행기에서 내려야 하는 처분을 받지 않을 권리가 명명백백하다.

이번 물벼락 갑질은 정부 차원에서 '갑질로 흥한 자는 갑질로 망한다'라는 확고한 근절 대책과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금수저들의 갑질은 건강한 사회의 고질병이며 가장 큰 적폐이기 때문이다. 훤히 드러나는 문신 탓에 겸양하며 씻는 조폭만도 못하다. 누구나 아는 집안에서 밥상머리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면 이제라도 목욕탕에서 배우시라. 탕 안의 벌거숭이 평등을 진작 알았더라면 언론과 공권력이 탈탈 벗기진 않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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