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부(富 )도 권력이라는 착각

입력 2018-04-24 00:05:01 수정 2018-05-26 21:49:30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그제 딸 조현민 전무의 '갑질' 논란과 관련해 사과문을 냈다. 축약하면 '조현아·현민을 그룹 내 모든 직책에서 즉시 물러나도록 하겠다'는 내용이다. 조 회장이 "모든 게 제 불찰이자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여론은 못내 차갑다. 대주주 일가의 고질화된 폭언과 갑질 등 안하무인식 패악질을 바닥까지 조사해 단단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한 번은 속아도 두 번을 속을까'라는 국민적 분노다.

지난 수십 년간 거침없던 부(富)의 위상이 위태해졌다. 상당수 한국의 부자들이 제멋대로 휘둘러온 부정한 권력과 횡포에 시민사회가 더는 참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고 있어서다. 부를 대물림한 이들의 까닭없는 욕설과 발길질에 맞서 분노의 돌팔매질을 선택한 것이다. 서슬 퍼런 정치권력도 뒤엎는 마당에 그깟 돈으로 쌓아올린 성채가 대수냐는 판단이 99% 보통의 사람들 심리를 관통한다.

그런 점에서 연일 터져 나오는 조씨 일가의 추태는 재벌을 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변곡점이다. 단순히 부자들 횡포에 대한 거부감이나 반재벌 정서 차원이 아니다. 남보다 많이 가졌다는 이유로 주변의 보통 사람들을 '욕해도 되는 하찮은 존재'로 여기고 마구 대하는 시대착오적 졸부 근성에 대한 저항이자 '을·병의 반격'이다. 상식과 동떨어진 부의 개념이 권력으로 변질되고, 기업을 사유화한 것도 모자라 공법(公法) 위에 군림하면서 마침내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참다못한 대한항공 전·현직 직원들이 '갑질 제보 채팅방'을 만든 이유다. 개설 일주일 만에 1천 명에 가까운 사람이 몰렸다. '대한항공 사명 교체'와 '국적기 지위 박탈' 등 청와대 청원에 10만 명 이상 참여한 것도 심상찮은 조짐이다. 이는 부자들의 비뚤어진 선민의식, 특권의식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반발이다. 일상이 되다시피한 일부 재벌 일가의 횡포에 역겨움을 느끼는 국민이 그만큼 많다는 소리다.

지난 2월 집행유예로 풀려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사례는 도화선이다.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분노의 심지에 불을 댕긴 출발점이다. 부의 힘이 선출된 정치권력을 능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니 오죽했을까. 쫓겨난 전직 대통령과 달리 이 부회장은 고작 353일 만에 수의를 벗었다. 이런 결과만 놓고 보면 합리적인 사고와 상식에 기초한 민중의 호흡이 더욱 가빠지고 있음을 감지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부의 보상물이 아니다. 권력은 대중이 인정한 권위의 소산이자 좋은 리더십을 뒷받침한다. 만약 이에 의탁하지 않고 제 손으로 만든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인성도 능력도 안 되면서 부를 대물림한 이들이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벌이는 제멋대로의 행동은 힘도 권위도 아닌 반사회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오너 리스크'가 재벌만이 아니라 중소기업에까지 만연했다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현실이다.

무엇보다 무분별한 권력은 스스로를 망치는 흉기임에도 우리나라 부자들은 이에 매우 둔감하다. 분명한 사실은 절대왕정 시대에도 잘못된 권력은 꼭 치리(治理)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가 권력의 주체인 현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민란(民亂)은 결단코 우연히 일어나는 사변이 아니다. 벌어지는 일과 현상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누구나 궐기의 이유와 정당성을 갖다댈 만큼 간단하고 명확하다. 지금 기운을 키우고 있는 을의 반격이 당연한 이유다.

무서운 것은 민란은 반드시 단호한 결과와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는 동서양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민중이 일으킨 물결은 무소불위의 권력이라 하더라도 가차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국민의 눈 밖에 난 몇몇 재벌이 이제서야 이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면 늦어도 한참 늦다. 평소 하던 버릇대로 물컵을 던지고 욕하고 악쓰던 버릇이 열길 높이의 해일로 되돌아올 줄 어찌 알았을까. '사악한 부'에 대한 을의 되갚음이 거기서 그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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