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첫사랑 생각하며 2시간 만에 써내려간 곡
"노래에 자신이 없어 가수는 생각도 안 했고 그림이 좋아 화가가 되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 매형의 클럽에서 노래를 하기 시작했는데 제법 인기를 끌었습니다. 얼마 뒤 대형 업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고 그곳에서 만난 하수영의 소개로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죠."
누구에게나 인생에 반전은 있다. 반전은 '그릇을 엎어 전혀 다른 물질을 담는 작용'이다. 수줍음 타는 '음치 청년'에서 고정 팬을 몰고 다니는 인기가수로, 최백호에게 가수란 직업은 이렇게 '반전'처럼 왔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노래는 어느새 그를 톱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중간중간 고비도 여러 번 있었지만 또 다른 반전이 그 위기를 넘겨주었다. 스스로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운(運)'이라고 말하는 최백호. 28일(토) 대구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분주한 최 씨로부터 그의 '운수론'에 대해 들어보았다.
◆우연히 잡았던 마이크가 직업 가수로=최백호 씨의 고향은 잘 알려진 대로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6·25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인 1950년 4월에 태어났다. 최백호의 가계(家系)와 관련해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 선친 최원봉 씨에 관한 이야기다.
최원봉은 1940년 '부일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사건)에 연루돼 동래고보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이 공로로 정부 수립 때는 국방부 감찰과장을 역임했고, 1950년에 치러진 제2대 총선에서는 무소속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독립운동 가문에 유망 정치인을 부친으로 두었지만 그 명예와 권세는 최백호에게 한순간의 '빛'도 돼주지 못했다. 최 씨가 생후 5개월 되던 때 부친이 6·25전쟁 중 의문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이후 가족의 생계는 고스란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모두 힘들었던 시기 살림은 궁핍했다. 화가가 꿈이었지만 대학 문턱에서 또 한 번 운명이 그를 가로막았다. 1970년 어머니가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생활이 어려워지고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던 시절, 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매형이 부산 서면에서 라이브 클럽을 운영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손님 없는 시간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얼마 안 있어 서울 쉘부르 출신 가수들이 노래하던 대형 클럽으로 스카우트되면서 본격적인 가수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서울로 무대를 옮겼고 '열애'를 작곡한 최종혁 씨를 만나 음반을 취입했다.
◆10대가수, 가요대상 휩쓸며 톱스타로=1977년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꾸준한 판매고를 기록하며 가요계에 최백호의 존재를 알렸다. 이 노래는 최백호가 1970년 10월 15일, 인생의 전부였던 어머니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슬픔과 그리움을 담은 사모곡이었다.
이 음반은 노래가 크게 히트하면서 품절 사태를 빚었고 그해 추가 제작에 들어가며 순식간에 8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당시는 신인 가수의 데뷔 음반이 1만 장만 팔려도 성공적이었던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엔 인기그룹 산울림, 사랑과 평화, '모모'의 김만준 등과 함께 가요계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1980년대 초 MBC 10대가수, KBS 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받으며 정상에 올랐다.
방송 3사 음악상을 그랜드슬램하며 승승장구했지만 화려한 조명 뒤에는 또 하나의 우울한 '반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최백호는 개인적인 불운과 시련을 겪으며 슬럼프를 맞기 시작한다. 후속 앨범마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대중도, 무대도 그를 외면했다.
"한동안 단돈 100원도 벌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히트곡이 없으니 불러주는 무대도 없고, 후속 앨범이 없으니 팬들도 고개를 돌리더군요. 결국 1989년 처가가 있는 미국 LA로 가서 한인방송 라디오 DJ를 하며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1992년에 다시 귀국해 공연 활동을 이어갔고, 3년여 공백 끝에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앨범이 나오고 1년 반 동안 반응이 거의 없었다. 앨범이 한 달에 스무 장 정도 팔렸으니까, 하루 1장도 못 판 셈이다. 이렇게 1995년이 지나갔다.
◆사장된 '낭만에 대하여' 음반의 대반전=재기를 위해 올인했던 12집 앨범이 흥행에 참패하면서 최백호는 실의에 빠졌다. 그때였다. 제2의 '반전'이 시작됐다. 하루에 한 장도 안 팔리던 음반이 2천 장씩 팔리기 시작한 것이다. IMF를 목전에 둔 1996년 무렵이었다. "그때 KBS 드라마 '목욕탕집 사람들'에서 탤런트 장용이 술에 취해 이 노래를 부른 거예요. 드라마를 보던 시청자들이 노래 가사와 극(劇)에 매료되면서 노래를 수소문하기 시작한 거죠."
라디오에서 우연히 이 노래를 들었던 작가 김수현 씨는 가사에 꽂혀 다음 날 그 노래를 대본에 추가했다고 한다. 김 작가의 예상처럼 이 노래는 '중년의 감성'을 자극하며 50, 60대 시청자들의 '절대 공감곡'으로 등장했다.
이런 극적인 반전과 달리 이 히트곡의 탄생 배경은 의외로 단순했다. "목동 아파트에 살 때였어요. 점심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는 아내를 보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내 첫사랑도 지금은 어딘가에서 아내처럼 설거지를 하며 늙어가고 있겠지…. 소파에 기대 가사를 써내려간 지 두 시간 만에 곡을 완성한 것 같아요."
드라마는 잠자던 음반만 깨운 게 아니었다. 최백호의 전화벨을 깨우고, 스케줄 표까지 빽빽하게 채워 주었다. 10년 동면의 최백호가 중년의 향수 아이콘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영화, 그림, 컬래버레이션 등 다양한 장르 실험=올해로 최백호는 데뷔 41년을 맞았다. 작년엔 음악 나이 40세를 맞아 '불혹'(不惑) 콘서트를 열었다. 뒤늦게 '낭만 전도사'로 불리며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예전처럼 하루 4, 5곳씩 김밥을 먹으며 뛰어다니는 정도는 아니지만 불러주는 자리가 있고 노래를 청하는 무대가 있어 늘 감사하다.
6·25전쟁둥이니 최백호는 올해로 68세를 맞는다. 생물학적으로는 초로(初老)에 접어들었지만 꾸준히 관리를 한 덕에 아직 건강에 큰 걱정은 없다.
최백호는 지금 '밀린 숙제'에 열중하고 있다. 화가 꿈에 대한 미련으로 여섯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고, 어느 통기타 가수의 삶을 담은 영화 '미사리'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꾸준히 젊은 가수들과 컬래버레이션도 하고 있다. 기타리스트 박주원, 아이유, 에코브릿지와 함께한 협업은 CF 제의까지 들어올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서울, 부산이 주 활동무대라 대구경북에 특별한 연고는 없다. 술친구, 음악 친구 몇 명이 다다. 그럼에도 지역에서 최백호는 '명예 시민급'으로 인기가 높다. '영일만 친구' 덕이다. 프로야구 삼성 경기가 열리는 포항구장에서는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가 응원가로 터져 나오고 K리그 포항구단의 메인 응원가는 원년부터 '영일만 친구'다.
'영일만 친구' 그가 1년 만에 대구를 찾는다. 작년 '불혹 콘서트'에 이어 다시 한 번 대구 팬들과 만난다. 4월의 깊어가는 밤, '입영전야'의 향수와 '낭만에 대하여'의 감성에 빠져들고 싶다면 28일 오후 7시 수성아트피아 용지홀로 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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