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는 제과제빵이 유망직종"
고교생 때 읽은 신문기사로 희망
학교 가는 터미널서 우연히 접해
방과 후 밀가루'설탕'달걀과 씨름
"공부를 못해서 말썽을 피우다 보니 갈 만한 학교도 마땅찮은 처지였어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몰려 있는 곳이라며, 자포자기 상태로 지냈다면 지금의 저는 없겠죠. 아, 지금 모교 후배들은 그렇지 않아요. 전 논산공고 식품가공과 출신입니다."
1990년 고교생이 된 이석원에게 이렇다 할 꿈이란 없었다. 공부를 못해 고교 진학도 불투명했다. 대전이 집이던 그가 겨우 진학한 곳은 논산이었다. 지금이야 식품 관련 학과들이 청소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17세의 이석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대전에서 논산에 있는 학교에 가야 하니 터미널에 앉아 있는데 스포츠신문이 떨어져 있어요. 그걸 주워서 읽는데 앞으로는 한식, 제과제빵이 유망할 거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희망 같은 게 생겼죠. 제 인생을 바꾼 순간이 아닌가 싶네요."
시급 500원을 받는 조건으로 동네 제과점에 들어갔다. 제빵사 어깨너머로 기술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적성에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계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제과제빵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 당시의 기억과 학습 과정은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제대로 앓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자주 풀어놓는 단골 메뉴다.
오후 3시 즈음이면 수업을 마쳤다. 시간이 넉넉했다. 기회였다. 대학 진학이 목표인 아이들이 국어, 영어, 수학을 공부하느라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했다면 그는 밀가루, 설탕, 달걀을 스스로 공부했다.
"대학은 배울 게 생겼을 때 필요하면 가면 되지, 남들이 간다고 가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대구 삼송빵집, 안동 맘모스보다 유명한 대전 성심당의 최연소 총괄 셰프가 된 이석원의 본격적인 '빵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고 3이던 1993년 실습생으로 대전 성심당에 들어갔다. 2004년 총괄 셰프 자리에 올랐다. 이후 제과기능장이 됐고 국가대표로 세계대회에 나갔고 제과제빵업계가 인정해줄 정도가 됐다.
지금은 자신이 만든 '랑꽁뜨레' 과자점을 경주에 2곳, 울산에 3곳 열었다. 대형 제빵업체의 마케팅도 두렵지 않다. 역발상으로 승부한다. 제일 잘되는 업체의 매장을 쫓아다닌다. 소비력이 검증된 곳이기 때문에 대형 제빵업체 체인점 주변에 자신의 가게를 낸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장점으로 승부하면 됩니다. 모든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 게 아니듯이 각자의 장점을 살리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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