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밤이 되면 식당에 자연과 기타 하모니, 단골 될 수밖에

입력 2018-03-30 00:05:04

어릴 때 외조부님이 대구에 오시면 항상 "'수랙'(수락)이가 실컷 가르쳐 놨더니 겨우 대학에서 한문이나 가르치고 남의 병풍 글씨나 써주며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한심하게 산다"고 투덜대셨다. 아시다시피 이수락 선생은 대구경북 최고의 유학자이시고 대구향교의 전교까지 하신 분인데 당시 우리 할배 눈에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의성 진성 이씨들 집성촌에서 서당 훈장 하는 할배의 눈에는 퇴계 후손이 민촌(民村)인 대구로 가서 사는 꼴도 보기 싫은데 일본인들이 도입해 놓은 시스템에 적응해서 사는 제자의 삶이 심히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제자뿐만이 아니고 대구 사람 모두를 다 그렇게 내리 보았다.

외가 동네 네 명의 아재비, 조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장구, 북, 꽹과리 그리고 징을 몰래 챙겨 들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다 저녁에 내려왔다. 아무도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지는 못했어도 무엇을 하고 왔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아재들은 호랑이 할배의 성격을 무서워하면서도 공일날만 되면 산속으로 들어갔다. 요즘이야 가요교실, 가곡교실 그리고 기타, 색소폰, 하모니카, 국악기 학원들도 많고 정부기관에서도 가르치는 판인데 당시 반촌(班村)에서 갖바치나 상것도 아니면서 꽹과리를 친다는 것은 동네서 퇴출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네 '부라더스 포'는 발걸음 죽이고 오랫동안 산속을 들락날락했다.

불로천 상류를 따라가다 도동 측백나무 숲 못미처에 매운탕 집이 하나 있다. 문패도 번지수도 다 있다. 그러나 시내서 올 때 교통이 불편하고 주인도 소신 영업하는 탓인지 그다지 붐비는 집은 아니다. 그러나 한 번 온 사람은 이 집의 단골이 된다. 매력이 있는 집이다. 매운탕이 맵지 않다. 없어진 강창 매운탕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릴 때 그 맛이다. 혀가 터지게 아프고 짭고 맵게 해서 그게 매운맛이라고 우기는 요즘 것은 탕의 자격이 없다. 목 넘기기가 쉽고 혀에 은근히 감기는 매운맛 그러나 땀이 나는 매운맛. 그 맛이 이 집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이 식당에서 메뉴 선택권은 주인에게 있다. 손님이 주제넘게 "빠가사리 주시오. 메기 주시오, 붕어 주시오" 하지 못한다. 이 집은 그날그날 잡아오는 고기에 따라 요리하기 때문에 언제 무슨 고기가 상에 오를지 모른다. 손님은 다만 "오늘은 무슨 요리가 되나요?"라고만 물을 수 있다.

주인은 듣기 싫을지도 모르지만 이 집이 문전성시 이루지 않기를 바란다. 조용해야 가게 옆으로 흐르는 불로천의 물소리, 측백나무에 깃든 새소리, 산야초(山野草)가 싹 트는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주인의 기타 연주를 듣기 위해서다. 이 집은 음악카페가 아니다. 주인이 기타를 치고 드럼을 치는 걸 아는 사람도 잘 없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나 늦은 밤 가게가 '시마이'하면 주인은 기타를 잡는다. 밤하늘의 별똥별과 샛강 흐르는 소리가 기타의 합주곡이다. 주인은 우렁각시처럼 낯가림이 심해 남이 있으면 연주를 하지 않는다. 단골 자격이 있는 사람이 진실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며 빌고 조르면 그제야 주인은 '애수의 소야곡'을 들려준다. 계속 아부를 하면 '해운대 엘레지'도 들을 수 있다. 연주곡 중에 가슴 찡한 곡은 기타로만 연주되는 '달도 하나 해도 하나'이다. 노래 가사도 눈물이 난다. 6'25 때 대구형무소에 예비 검속되어 있던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가창골에서 집단 총살될 때 불렀던 노래이다. 사장님의 애창곡 '번지 없는 주막'이 나오면 공연의 끝이다. 이때는 주객이 제창하며 식당의 불도 꺼진다. 외가 아재들, 식당 주인 다 나보다 옳게 산다.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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