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양봉과 꿀벌나라

입력 2018-03-28 00:05:00 수정 2018-10-12 09:34:05

'산이 있는 고을에 양봉통(養蜂筒)을 설치하게 하라.'

600년 전인 1418년 태종 18년 3월 24일, 임금은 호조의 건의대로 1년에 공물(貢物)로 나라에 바치는 꿀을 감안, 전국의 산이 있는 각 고을 즉 산군(山郡)에 양봉통을 나누어 정해 꿀벌을 기르게 했다. 말하자면 나라에서 필요한 꿀을 확보하기 위해 꿀벌을 기르는 통(양봉통)을 설치하게 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이다.

예부터 꿀은 귀했고, 아무나 맛볼 수 없었다. 그런 만큼 꿀은 신선을 위한 선약(仙藥)으로, 꿀벌은 신선의 사자(使者)로까지 소개됐다. 신라 신문왕은 결혼 폐백 예물로 보낼 정도였다. 꿀이 들어간 고려 때의 유밀과는 중국에까지 알려져 인기였다.

꿀이 이랬기에 백성은 벌꿀을 공물로 바쳐야 했고 지배층과 관리, 권세가들에게 빼앗겼고, 당시 꿀은 뇌물로도 쓰였다. 물론 백성들이 양봉으로 얻은 꿀로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이 땅의 힘 있는 자는 꿀벌을 기르는 대신 수탈에 능했기에 꿀과 양봉은 이래저래 백성의 짐이었다.

태종이 양봉통 설치로 백성 부담을 덜게 한 까닭이다. 그런데 1420년 세종실록 기록을 보면 임금의 뜻은 잘 이행되지 않은 듯하다. '지금 관가의 벌통을 양봉하는 민가에 갖다 두고 해마다 거기에서 생산되는 꿀을 걷어 들이므로 백성이 모두 싫어하고 귀찮게 여겨 양봉하는 사람이 적어지므로 마침내 벌꿀의 값이 비싸게 되었사오니'''모두 혁파하여 백성의 폐해를 덜어 주옵소서.'

우리 양봉은 바다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주인공은 백제 의자왕 아들인 태자 부여풍(扶餘豊)으로, 그는 643년 꿀벌 판 4장을 갖고 미와산에서 양봉하다 실패하고 말았다. 일본에서는 꿀벌이란 단어조차 없어 '파리 떼'로 여길 즈음이다. 발해는 739년 일본에 꿀을 수출까지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로 일본 양봉 역사의 시작은 백제 태자 부여풍으로 돼 있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우리 양봉이 28일 경북 칠곡에서 새로운 만남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 유일의 양봉특구인 칠곡에 꿀벌 주제의 '꿀벌나라' 공원이 개관식을 갖고 다양한 양봉 세계를 선보일 예정이다. 100년 전인 1918년 독일인 구걸근 신부가 펴낸 최초 양봉 교재인 '양봉요지'의 원본 공개를 비롯, 여러 자료와 볼거리, 체험거리 등을 갖춘 만큼 지난 양봉 역사와 미래 양봉까지 살피는 공간인 셈이다. 양봉의 새로운 도약을 꾀하는 기회이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꿀벌나라 나들이, 우리 양봉 역사를 알면 그만큼 덤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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