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불시일번한철골. 쟁득매화박비향)
"뼈가 부러지는 듯한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 당나라 황벽선사의 시 중에서
도산서원 앞마당에 매화가 피었다. 매화의 가지는 굵게 뻗쳐 나가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기개가 있다. 꽃은 부드럽게 피어 자연스럽고 담담한 멋이 서려 있다. 퇴계 선생이 매화를 유독 좋아했다는 일화 때문인지, 매화를 보노라면 으레 퇴계 선생이 떠오른다. 엄동설한 눈 속을 뚫고 피는 매화의 고요하고도 강인한 이미지가 고고히 학문에만 정진하던 선생의 모습과 닮았다. 침묵과 고요를 깨뜨리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향기의 끝은 그야말로 가없다.
퇴계 선생의 글에는 온통 매화가 가득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 조선의 대유학자 퇴계 선생의 정신을 대변하는 꽃이 바로 매화다. 선생이 학문에 열정을 품었다는 도산서원의 마당에는 수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다.
옛 선비들은 '매화는 함부로 손대지 말 것이며, 함부로 논하지도 말라'고 했다. 아마도 추위를 이기고 잎을 여는 용기와, 잔바람에도 쉽게 잎을 떨쳐 내지 않는 모습이 곧은 선비정신과 닮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매화를 두고 꺾이지 않는 절개와 영원불멸하는 지조라고 칭송했다.
여러 그루의 매화 중에서도 유독 퇴계매에 마음이 쏠린다. 선생과 한 여인의 아련하고도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음이 까닭이다. 눈을 덮어쓰고도 꽃을 피운 매화가 450년 전의 사랑을 전해준다. 선생은 나이 마흔의 후반에 관기였던 두향을 만나 마음을 나눴다. 선생의 고고한 기품을 보고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 두향은 몇 개월간의 짧은 사랑을 잊지 못했다. 떠나는 선생에게 두향은 매화 한 그루를 정표로 건네주었고 퇴계는 두향을 그리워하며 평생 매화나무에 정성을 쏟았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화를 투시했던 퇴계 선생은 평생 매화에 특별한 애착을 가졌으며, 백 편에 가까운 시를 써 '퇴계매화시첩'을 남겼다. 선생은 일흔을 앞둔 해에 눈을 감으면서도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고 할 만큼 매화를 아꼈다. 선생의 부음을 들은 두향은 문상 후 스무 해가 넘도록 수절하며 끝내 강선대에 몸을 던졌다. 멀어서 더 그립고 애틋한 두 사람의 사랑은 요란하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가장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는 지조와 절개를 보여주는 대표 꽃이 되었다. 여린 매화가 눈 속에서 꿋꿋이 버텨내는 모습에 눈물겨운 경외감이 인다.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아도 제 향기를 팔지 않는 지조를 지키고 있다. 퇴계 선생과 두향의 사랑 이야기는 오늘날 사랑의 존엄함을 함부로 여기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사람들에게 잔잔하고도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눈을 감고 몸 깊숙이 향기를 들인다. 세월의 녹록함에도 변하지 않는 묵향처럼 까무룩 번지는 향은 흐트러진 마음까지 정갈하고 경건하게 모아 놓는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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