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호황과 불황의 차이

입력 2018-03-20 00:05:00 수정 2018-05-26 21:54:25

일본이 '디플레이션' 탈출을 선언했다. 버블 경기가 꺼지면서 촉발한 '잃어버린 20년'이 마침내 끝났음을 공식화한 것이다. 8분기 연속 성장세를 기록한데다 경기지수가 1985년 이후 33년 만에 최고점에 도달한 점 등 불황의 끝을 알리는 단서는 많다. 질을 떠나 3% 이하의 실업률은 거의 완전고용 수준이다. '일본병'을 떨쳐냈다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그동안 일본 경제를 옭아맨 디플레이션은 말 그대로 기나긴 가위눌림이었다. '주식회사' 일본 전체가 부실과 경쟁력 상실로 휘청대면서 소득이 급감하고 소비는 바닥을 기었다. 짧게는 10년, 길게 보면 20년간 불황의 터널에 갇혀 정부도 기업도 국민도 신음했다. IT 붐으로 2000년대 초반 반짝 회복기(이자나미 경기)가 있었지만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또다시 주저앉고 만다.

주목할 것은 '백약이 무효'라는 말까지 나온 일본 경제가 다시 상승 곡선을 긋게 된 힘이다. 2012년 12월 두 번째 집권한 아베 총리는 황당한 '아름다운 일본' 표어 대신 작심하고 "경기가 살아날 때까지 돈을 풀겠다"고 선언했다. '추한 일본' 선언이자 '아베노믹스'의 출발이다. 일본은 이전에도 마구잡이로 돈을 푼 전력이 있다. 1985년 미국 압력에 엔화 가치가 급상승하고 경기가 급격히 위축하자 나카소네 내각은 돈을 풀기 시작했다. 불경기가 닥치면 구조개혁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순서다. 하지만 일본은 경기를 되돌려 놓겠다는 일념에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금리부터 낮췄다. 버블의 서막이다.

풀린 돈이 갈 곳이라곤 거의 정해져 있다. 부동산'주식에 쏠린 돈은 결국 자산시장의 거품을 키웠다. 1988년 주식 시가총액 기준 세계 50대 기업에 일본 기업이 30개가 넘을 정도였다. 반면 아베 정부는 비슷하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먼저 무제한 돈 풀기를 통해 대놓고 엔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통화 전쟁'을 벌여서라도 수출 경쟁력을 되살린다는 의도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리고, 산업구조 개편과 성장동력을 정조준했다. 아베노믹스의 핵심 지렛대인 '3개의 화살'이다.

무작정 돈을 푼 게 아니라 경쟁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일본의 경기 회복은 배수진을 친 아베의 노림수에다 일본 기업의 각성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2월 현재 닛케이 평균주가가 24,000선을 회복한 것은 1991년 이후 무려 27년 만이다. 일본 주요 기업 매출과 순이익은 2년 연속 사상 최대다. 제조업 일자리도 7년 만에 1천만 개를 넘어섰다. 해외로 나갔던 공장들이 유턴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외환 위기와 세계 금융 위기의 '더블 펀치'를 맞은 한국의 불황은 현재진행형이다. '경제 대통령' 외치던 MB 정부는 5년 내내 죽을 쒔다. 박근혜 정부는 '초이노믹스' 흉내 내며 돈을 풀었다가 부동산 광풍만 불렀다. '소득 주도 성장'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도 1년 넘게 세금으로 일자리 늘리기에만 매달리면서 정책 구심점이 실종된 상태다.

우려할 대목은 정부의 정책 행보가 일본이 실패한 길 위에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가 독주하면서 장관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다. 일선 부처는 청와대가 벌여놓은 일들을 선전하는데 시간을 죽이고 있다. 기업은 아예 뒷전이다. 기업만한 지렛대가 없는데도 방치하다 못해 쳐낼 돌로 여긴다. 컬링에 비유하자면 기업은 '테이크 아웃' 표적이다.

잘 걷히는 세수 때문에 세금은 이제 만능열쇠가 됐다. 중소기업에 취업하는 청년들에게 연간 1천만원씩 지원할 정도로 통도 크다. 공무원 증원은 기본 사양이고, 공공기관 일자리도 돈으로 막겠다니 이리 후한 정부가 없다. "기업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건 고정관념"이라는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올 정도다. 문제는 세금 장작을 땐 '특단의 대책'이 정부의 기대를 배신할 때다. 지금 급한 것은 정치철학의 구현이 아니다. 온갖 비판이 쏟아졌지만 아베노믹스는 그런 점에서 오만하지 않고 솔직하다. 하나에 매달리다 둘'셋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멍석은 깔아야 멍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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