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광의 에세이 산책] 조금은 외로워도

입력 2018-03-20 00:05:00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봄날이 오면 뭐 하노 그쟈,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데 ….'

1970년대 유행했던 최백호의 '그쟈'라는 가요 한 부분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맛깔스럽게 살린 노랫말이 정겨워서 그야말로 봄날이 오면 자주 흥얼거린다.

이른 아침, 마을 이장님이 텃밭에 넣으라며 거름을 가지고 왔다. 지나다니는 길에 거름이 부족하다며 늘 타박이더니 아예 거름을 들고 왔다. 농사 시기를 잘 모르기도 했지만 게으른 천성 탓에 늘 마을 어른들이 채근해야 일을 시작한다.

거름을 옮겨놓고 돌아서니 바람이 다르다. 며칠 전만 해도 찬바람이 무섭게 불었는데 볼에 스치는 바람이 솜털처럼 간지럽다. 그 바람이 집 밖으로 나가자며 잡아끄는 통에 호미곶 바닷길로 나갔다. 집에서 바다로 난 오솔길을 따라 3분이면 바다다. 해안을 따라 천천히 봄기운을 싣고 오는 바람과 함께 걸었다. 바다도 해바라기 하는 고양이처럼 고요하다. 봄날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더니 영해 표지점이 있는 그 길에는 엊그제까지만 해도 거의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잘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바람이 거친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둘레길을 따라온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모두 낯설지 않다. 봄의 손짓을 마다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고석초 짬, 갯바위에 이르자 할머니 몇 분이 장화를 신고 물에 엎드려 있었다. 갯바위에서 무엇을 뜯고 있었다.

"할머니, 뭐하세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일하는 분들을 성가시게 했다. 허리를 펴는데 이웃 해녀 할머니였다.

"바람 쐬러 나왔구먼. 김도 따고, 톳도 따고, 미역도 건지지."

할머니 걸망 배가 벌써 불룩했다.

"아직 물이 찰 텐데요."

"아니야. 따뜻해. 어디 손 넣어 봐."

그 말에 나는 얼른 손을 물에 담가 보았다. 소름이 돋을 만큼 차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다는 그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푸른 해초들을 길러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닷물 위로 모자반 공기주머니가 낚시찌처럼 올라와 있었다. 해안 끝까지 걸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왔다.

텃밭을 둘러보고 있는데 잡초가 제법 자라 있었다. 뽑아내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들도 봄 햇살을 만끽하며 제 나름 삶의 환희를 즐기게 하고 싶었다. 이웃 할머니들에게 또 타박을 들을 것만 같아서 혼자 풀썩 웃었다. 그때 일을 마치고 지나가던 해녀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이것 먹어 봐요. 향긋할 게야."

햇미역 한 줌을 건네주었다. 봄 바다 향기가 가슴 가득히 안겨왔다. '봄날이 오면 뭐 하노 그쟈.' 우리 모두는 세상일에 몰두하느라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연락도 잦지 않다. '그래도 우리 맘이 하나가 되어 암만 날이 가도 변하지 않으면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타 그쟈.' 이렇게 마음 나누는 봄을 맞이할 수 있으니까.

김일광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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