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父子 암살 기도…사형 선고에도 꺾이지 않은 독립 의지
지난해 문경 출신 독립운동가 박열(1902~1974) 의사와 일본인 부인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항일운동을 다룬 영화 '박열'이 개봉된 후 문경에 있는 가네코의 묘지와 박열 의사의 생가 및 기념관에 방문객들이 크게 늘고 있다.
영화는 6월에 개봉됐지만 지난해 박열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은 2만6천346명으로 전년도보다 180%나 늘었고 올해 2월 한 달만 따져도 영화 개봉 전인 지난해 2월보다 방문객이 50% 이상 늘었다.
국적이 다른 이들 부부의 항일운동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아 한일 양국에서 재조명받고 있다.
◆문경의 아들 박열 의사
"지구를 깨끗이 청소하는 일 가운데 첫걸음이 일본 제국을 쓸어버리는 일입니다." 의사 박열의 기개다.
박열은 1902년 문경에서 태어나 탄광촌에서 일본인에게 착취당하는 조선인들의 참상을 보고 자랐다. 그는 함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5세에 서울로 올라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학과에서 수학했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3'1운동 만세 시위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을 당하고 1919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가쿠엔고등학교에서 수학한다.
당시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신문 배달과 인력거를 몰면서 어렵게 고등학교에 다녔다.
1920년 일본에서 조선 청년들과 함께 의혈단, 흑우회를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2년 2월 자신의 시를 보고 공감한 '운명의 여인'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결혼, 평생 동지가 된다.
박열 의사는 부인 가네코와 함께 일본 왕세자 결혼식에서 일왕 부자 암살을 기도해 일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일왕과 왕세자 암살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대역죄 혐의로 구속돼 4차례에 걸친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향후 무기로 감형됐다.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박열의 기개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법정에서 수의가 아니라 조선관복을 입는 것을 관철할 정도였다. 이는 그의 기개가 만천하에 알려진 계기가 됐다. 공판이 열리기 전 박열은 면회를 갔던 조선 학우회의 조헌영(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에게 자신과 부인에게 한복을 입고 재판받게 해달라고 부탁해 한복을 차려입었다. 박열은 혼례복에 사모를 쓰고 관대를 둘렀으며 태극선까지 들었다. 가네코는 흰 옥양목 저고리에 검은 공릉치마 차림을 하고 법정에 섰다.
법정에서 박열은 "일본 왕을 대표하는 재판관이라면 나는 한국 민족을 대표하기에 한복을 요구하는 것이며 재판관석과 피고석의 높이를 동등하게 하고 나는 한국말을 사용할 테니 통역을 딸려라"고 해 재판관이 주눅이 들 만큼 기개가 당당했다고 한다.
박열 의사는 무려 22년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해방 이후 풀려나 백범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이봉창 의사 유해봉안 추진위원장을 비롯해 제일거류민단장, 신조선건설동맹위원장을 맡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이후 6'25전쟁이 일어나자 3일 만에 강제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조선인 박열을 사랑한 가네코 후미코(관련사진 첨부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 남자는 일본 전통복 차림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고, 여자는 그 남자에게 비스듬히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나른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며 여자의 가슴 위에 왼손을 걸쳐 놓고 있다. 사진 속의 두 남녀는 한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모습이며 그 분위기는 사뭇 관능적이다.
놀랍게도 이 사진을 촬영한 곳은 1925년 일본 도쿄의 한 형무소 조사실이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일왕과 왕세자 암살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였다.
대역죄를 저질러 사형 판결이 당연하던 상황이었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할 정도로 자유롭고 대범했던 박열과 가네코의 성향이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잘 묘사돼 있는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지 15개월 후인 1926년 7월 가네코는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24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의문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형 판결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우쓰노미아 형무소로 옮겨진 지 2주 만이었다.
가네코는 고통스러운 삶의 기억을 수감 중에 계속 적었고, 그의 친구가 원고를 모아 가네코 사후에 책으로 출간했다.
책에서는 조선 체험 부분이 있는데,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 3'1운동의 기억을 적고 있다. 학대받고 소외된 삶을 살았던 일본인 가네코는 일본의 폭압에 시달리던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 대해 연민과 더불어 동일시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그녀가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진웅 박열기념관 학예사는 "매년 홀수년 7월 23일에는 문경 박열기념관에서, 짝수년에는 일본 야마나현 가네코 후미코 외가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며 "박열 부부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학자들에 의해 혁명가적 사고를 가진 철학자이자 행동가로 재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박열 부부의 업적을 기리는 문경 사회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 2000년 박열의사기념사업회(회장 박인원 전 문경시장)를 발족시켜 학술세미나와 추모사업을 18년째 펼치고 있다.
박열기념관은 영화에 나온 '법정 투쟁'뿐만 아니라 유년시절, 사상잡지 발간 활동, 일 왕세자 히로히토 암살 계획 등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의 숨은 이야기를 관람객이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장과 상시해설을 운영한다.
기념관을 찾은 해당 분야 연구자에게는 연구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특히 올해는 일본에 남아 있는 박열 부부 관련 유물과 자료를 수집해 국민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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