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마음의 장애

입력 2018-03-17 00:05:00 수정 2018-10-16 12:03:34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고 TV에서 스포츠 중계를 찾는 나에게는 대부분의 방송이 빈 채널과 같았다. '이제 평창동계올림픽이 끝나고 나니 재미있는 것이 없네.' 그러던 중 지난 주말에 패럴림픽이 개막되었다. 미디어가 패럴림픽에는 관심이 없을 거라는 미디어의 부정적 자기 예언에도 불구하고 경기 중계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나는 관심을 갖고 패럴림픽 중계 채널을 찾아 몇 경기를 보았다. 내 눈에는 경기에 출전한 모든 선수가 영웅이었다. '어쩌면 저렇게 잘할 수가!' 한결같이 장애를 훌쩍 뛰어넘은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황민규 선수가 출전한 알파인스키 남자 대회전 시각장애 경기는 선수를 앞서서 인솔하는 가이드러너를 따라 시각장애 선수가 경주하는 경기였다. 선수가 청각과 기타 감각을 이용해서 가이드러너를 따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장애인과 정상인이 어우러져 함께 만드는 작품이었다. 시각장애 선수는 가이드러너를 완벽하게 보고 있었다. 가이드러너의 안내가 바로 시각장애인을 보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에서도 이렇게 기적같이 살 수는 없을까?

수년 전 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가 장애인학교 신축 예정지 옆 아파트 주민들에게 큰절을 하는 장면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아파트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에게 장애인은 아파트값 상승의 장애물이란다. 장애인학교는 혐오시설이란다. 내가 달려가 절하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사회를 대신해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마음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육신의 장애인들을 괴롭히는 형국이다.

아파트 앞 장애인 주차 구역에 한 정상인이 주차했다. 이것을 본 아내가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우지?" 내가 대답했다. "아마도 마음에 장애가 있겠지."

장애인 주차 구역에 주차한 정상인은 마음의 장애인이다. 장애인의 삶의 현실을 잘 보지 못하는 마음의 장애인이다. 육체적인 장애인은 자신의 삶을 힘들게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장애인은 타인의 삶을 힘들게 한다.

소위 정상인이라는 사람들이 도리어 타인을 향해 장애물을 쌓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잘 달리는 장애인, 잘 듣는 장애인, 말 잘하는 장애인, 잘 보는 장애인이 한결같이 마음의 장애인이다.

하나님은 마음의 장애인도 고치시길 원하신다. 이번 패럴림픽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많이 일어나길 바란다.

사람들은 장애를 장애인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장애에 대한 두려움을 장애인에게 투영한다. 고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장애인을 피하고 싶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병든 마음이 만들어내는 악마적 허상에 더 이상 속지 않으리라.

세상의 모든 인류는 서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다. 각자는 서로에게 타인이다. 장애인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 중의 한 사람 아닌가? 장애인 중에는 뛰어나게 다른 사람도 있다. 며칠 전에는 세계적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별세했다. 향년 76세. 21세 때 몸의 근육이 위축되는 '루게릭병'을 얻었지만 그는 발군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머러스하고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보통 사람과 달라도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타인은 다르다는 이유로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경계의 대상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편견을 부수어야겠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편견을 부수자.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는 한 명의 타인에 불과한 것을 알자. 나 역시 다른 사람의 배려가 필요하고, 친절이 필요한 사람이다. 때로는 긴박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 역시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존재다.

타인의 마음속에 있는 타인으로서의 나의 모습은 어떨까? 나부터 내 마음속의 타인에게 친절히 다가가야겠다. 우리 집 반려견을 잘 다루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듯이, 자기 마음을 잘 다루어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아야겠다. 내 마음속의 장애인이 문제이지, 길에서 만나는 장애인이 문제가 아니다. 내 마음속의 장애를 더 잘 보살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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