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미투와 포르노그래피

입력 2018-03-16 00:05:00 수정 2018-05-26 22:44:50

"정말 역겹고 괴로워요."

20대 직장인 김모 씨는 '미투(#Me Too) 운동'이 확산되면서 직장 생활이 더욱 고통스러워졌다고 했다. 매일 아침마다 "오늘은 뭐가 터졌냐"고 묻는 남성 동료들의 무례함 때문이다. '미투'에 연루된 유명 인사의 소식이 나올 때마다 "여자는 감정적이어서 건드리면 안 된다", "여자가 동의해도 남자가 다 뒤집어쓴다"는 식의 얘기를 스스럼없이 내뱉는다. 더욱 짜증이 나는 건 그다음이다. "저 선임이 뭐라고 하면 너도 미투해", "쟤 마음에 안 들면 미투해"라는 얘기를 장난처럼 건넨다. "피해자가 어렵게 피해 고백한 것을 두고 누가 또 인생을 망쳤나 싶어 구경하는 식이에요. 이게 미투를 포르노처럼 만드는 것과 뭐가 다른가요?" 미투 운동을 '젠더 감수성'을 돌아보는 계기로 보지 않고 '관음증'으로 변질시키는 또 다른 성폭력인 셈이다.

취업준비생 김모 씨도 "터질 게 터진 것"이라고 했다. "'미투'로 충격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요. 사실 여자라면 초등학생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성폭력을 당해본 친구가 압도적으로 많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성적인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교사들은 이름도 댈 수 있을 정도예요." 김 씨에게 성폭력은 흔하게 겪는 일상 경험인 셈이다. 생각만 해도 수치스럽기에 아예 묻어둘 뿐이다. "안희정 지사나 이윤택 연출가 같은 유명 인사들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어도 별로 충격받지 않았어요. 겉과 속이 다른 남성들을 워낙 많이 봤으니까요. 사실 이런 얘기를 들어도 별 충격을 받지 않는다는 게 더욱 충격적인 거죠."

거센 미투의 물결에 성차별에 둔감했던 한국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용기를 낸 피해자들의 고백을 맞닥뜨린 일부 남성들의 대응은 치졸하기 짝이 없다. '미투'를 여성들의 피해망상 취급하거나 '꽃뱀론', '음모론' 등으로 폄훼한다.

자기방어 수단으로 떠돌고 있는 '펜스 룰'도 마찬가지다. 펜스 룰은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Mike Pence)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마이크 펜스는 연방 하원의원이던 지난 2002년 한 인터뷰에서 '부인 없는 곳에서 다른 여성들과 함께 자리를 갖지 않는 것을 원칙'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이 원칙은 미국의 유명 목사 빌리 그레이엄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복음주의의 대부로 불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남성들이 부인이 아닌 다른 여성과 단둘이 있을 때 성적인 유혹에 취약해진다며, 다른 여성과 단둘이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21세기판 '남녀칠세부동석'인 펜스룰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성차별이 된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성적 도구로 대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과도한 경계는 여성들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는 직원 채용 시 여성을 기피하거나, 회사 업무에서 여성이 배제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립된 여성들은 직장 내에서 친밀감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새로운 유리장벽으로 자리 잡는다. 남성들도 여성 앞에서 행동을 조절할 수 있고, 여성을 희롱하지 않더라도 여성과 교류할 수 있다. 그 정도 이성은 갖고 있지 않은가?

SNS에서 떠도는 '몽구룰'이나 '현철룰'도 마찬가지다. 현철룰은 지난 2011년 한 유명 개그맨이 20대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가 성폭행 혐의로 피소됐는데, 두 사람이 성관계를 갖기 전에 합의하에 관계를 맺는다는 각서를 쓴 사실이 밝혀져 사건이 무마된 데에서 비롯됐다. '몽구룰'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2009년 10월 부인 고 이정화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자신을 보좌하고 자택을 관리하는 직원들을 모두 남성으로 교체했다는 설을 말한다. 모두 여성을 '꽃뱀' 취급하는 피해망상이나 극단적인 회피 심리에서 나온 '룰' 들이다. 미투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 구조를 깨는 모난 정이다. 아픈 만큼 충분히 맞고 부서져야 한다.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며 성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 것. 미투의 해답은 분리가 아니라 문화를 바꾸는 데 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