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재의 대구음악遺事<유사>♪] 대구여류시인 '지구가 아프데요' 발표

입력 2018-03-16 00:05:00

환경문제 관심 이끌어 내

1960년대 서울 시내버스 잡상인 중에는 사탕장수들도 많았다. "이 줄줄이 사탕은 저 멀리 강 건너 영등포에 자리 잡고 있는 ○○제과에서 만든…." 그들의 영업멘트의 시작은 늘 이랬다. 60년대 초까지 여의도에 공군과 민간 비행장(K.N.A)이 있었으니 한강 건너 영등포 공업단지는 서울 시내에서 한참 먼 곳이었다. 대구의 공장지대는 기차역 뒤 침산동에 있었다. 제일모직, 삼호방직, 내외방직, 대성연탄, 경북연탄 등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공장들이 침산동에 있었다.

영등포, 침산동 공장의 높은 굴뚝에서 내뿜는 검은 연기는 국부(國富)의 상징으로 시민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그 무렵 새벽이면 동촌이나 화원에서 농부들이 인분을 수거하러 '소구루마'를 끌고 시내에 왔다. 동촌에 가면 인분 냄새가 진동했다. 반야월 쪽은 능금농사를 지어 인분을 쓰지 않았지만 동촌역 주변과 검사동 쪽으로는 채소를 주로 재배하므로 이곳에는 냄새가 심했다. 공장의 매연과 폐수 그리고 소음, 시골의 무분별한 초목 남벌, 가축분뇨 방류와 거름 냄새는 심한 환경공해였지만 당시는 이것들이 나쁜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오히려 가난을 물리쳐주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시민들은 참고 살았다.

이런 시절 대구의 한 여류시인이 음풍농월(吟風弄月)적 작품활동에서 환경운동으로 뛰어들었다. 공장주들은 환경공해에 무관심하였다. 직원들이 공해로 죽어가고 시민들마저 병들어가지만 오불관언(吾不關焉). 농민들은 나무를 함부로 벌목하여 산천을 황폐화시키고 농축산 폐기물을 마음대로 버려 시민들의 삶의 질을 저하시켰다. 정부는 눈감고 있었다. 1993년 김황희(金凰姬) 시인은 쓰레기 분리수거통을 만드는 운동과 함께 시작(詩作)을 통해 환경운동을 시작하였다. 인간이 지구를 병들게 하면 결국 그 병든 지구는 사람을 멸망시킨다는 당시로는 앞서가는 명제를 주장하며 푸른 정신 심기를 시작했다. 이때 발표한 '지구가 아프데요'라는 시는 환경운동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의 일격을 주는 명작이다. 김 시인은 1994년에 환경노래보급협회를 설립하고 환경노래집 '지구는 아름다운 세상' 외 총 32편의 시가 실린 환경노래집을 만든다. 뒤늦게 정부와 관계기관들과 딴 도시들도 환경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김 시인은 KBS대구방송과 협조하여 시인 21명, 중등학교 음악교사와 대학 작곡가 교수 23명, 그리고 성악과들과 환경시를 노래화하고 발표를 위한 단체를 만들게 된다.

김 시인의 환경운동 초기는 중소기업을 하는 남편 윤창준 사장과 사재를 털어 단체를 만들고 책자를 만들며 고난을 시작했다. 몇 년의 어려운 시간이 흐른 뒤 조력자가 생기고 후원금도 생기게 된다. '환경을 깨끗이'가 초등학교 5학년 음악 교과서에 등재되고(1997년), 이어 '지구가 아프데요'가 초등학교 5학년 음악책에 실린다(2001년). 같은 해 중학교 환경 교과서에도 '금수강산'과 '지구 아낌없이'가 등재된다. 2000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고 이 무렵부터 전국적인 환경운동이 본 궤도에 오른다. 2006년에는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자원절약' '지구는 오아시스' '남북통일 별곡'이 실린다. 같은 해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산정에 올라'가 실린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던가. 김 시인은 65세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뜬다. 생전에 작시한 환경노래는 350여 곡이고 환경노래창작 모음집은 11권이 된다. 김 시인은 대구를 떠났다. 하지만 그가 참여해 만든 KBS 대구어린이합창단(1995년 시작)의 환경노래부르기 정기공연과 초중고 환경노래부르기 경연대회(1998년 시작)가 지금도 활발하게 진행이 되고 있다. 초목장으로 자연으로 돌아간 시인이 해마다 울려 퍼지는 이 합창단들의 노랫소리에 빙그레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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