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이념 넘어서는 휴머니티, 대구 학생운동 작품 준비
'1963년생, 실향민, 3녀 1남의 막내, 항일, 연극 자체가 삶, 애주가, 블랙리스트 1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개구리, 청춘예찬, 대구사랑 등.'
대체로 연출가 박근형의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모아봤다. 대략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단어들이 나열됐다고 봐도 무관하지 않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남도 신흥 출신이다. 북한에서는 앙숙인 두 지역의 남녀가 만나 대한민국 연출가 박근형을 막내로 낳고 길렀다. 6'25전쟁이 터지고, 부모는 남쪽인 서울로 내려와 실향민이 됐다. 누나만 셋인 그는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워했고, '연극판'이라는 놀이터를 찾았다. 그리고 현장에서만 35년 연극 인생이 계속되고 있다. 그에게 연극판은 인생 무대이자 삶 그 자체다.
◆대구를 사랑한 남자, 박근형
사석에서 두 차례나 만나 그의 대구 사랑을 확인했다. 박근형은 "대구 연극판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좋아한다"며 "지난달부터 대구에서 거의 살다시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11년 전 대구시립극단에서 초청 연출을 맡았고, 올해 다시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쓴 '해방의 서울'이라는 작품을 들고 대구로 왔다. 이달 9, 10일에 끝난 대구시립극단의 3월 정기공연은 박근형의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관객들을 웃음과 감동으로 몰아넣었다. 공연 내내 터지는 웃음은 그 시대 상황에 비춰볼 때는 아이러니하지만, 박근형만의 휴머니티를 대구시립극단 배우들이 잘 살렸다.
박근형의 대구 사랑은 진행형이다. 그는 제35회 대구연극제의 심사위원을 맡아 이달 22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대구에 상주한다. 잠시 수업 때문에 서울에 가야 할 때도 있지만 거의 대구에 머무를 예정이다. 그는 "대구 연극은 서울 다음으로 지방 최고"라며 "대구 연극인들과 교류하는 것은 즐거운 작업"이라고 말했다.
박근형은 대구시립극단 단원들에 대한 극찬도 아끼지 않았다. "극단 내 파벌도 없는 것 같고, 개인의 연기력도 뛰어나지만 자율성과 유연함, 화합(팀워크) 등 3박자를 갖추고 있습니다. 연출이 뭔가를 의도하면 배우들이 알아서 답을 찾아냅니다. 저는 무대에서 마음껏 자기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했습니다."
그에게 굳이 대구시립극단의 부족한 점 하나만 꼽아달라고 하자, "전체 팀워크는 좋지만 배우 각자가 연기할 때, 자기 대사만 하려 하지 말고 전체 그림을 그려가며 상대 배우와 호흡한다면 더 좋은 앙상블 연기가 나올 겁니다"라고 꼬집었다.
박근형은 대구의 새싹 배우들을 위해 봉사시간도 가졌다. 대구에 머무르는 동안 박현순 전 대구연극협회장이 추천한 5명의 젊은 배우들에게 '한밤 워크숍' 형태로 사설 연극강좌를 열어줬다.
◆핫이슈 '미투 운동'에 대해 한 말씀
댓바람에 물었다. "혹시 박근형 쌤은 미투 운동에 걸릴 것이 없습니까?"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성희롱'성추행'성폭행과 관련해서는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예전에 도제식으로 연기를 가르칠 때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의 기합과 가볍게 때리는 정도는 했는데, 그것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겠죠."
올 초 우리 사회에 광풍처럼 들이닥친 '미투 운동'에 대한 생각도 피력했다. "산불이나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황폐화되지만 그 속에선 좋지 않은 것들도 쓸려가듯이, 남성 중심의 우리 사회가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더 나은 남녀평등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성들을 성(性) 도구화하려 했던 남성들은 스스로 깊이 돌아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그는 연극계 거장들이 미투 운동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데 대한 유감도 표명했다. "대한민국 연출계의 거장 이윤택, 극작가이자 연출가 오태석, 국민 배우 오달수 등 존경하는 선배나 좋은 후배들이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언급돼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하지만 그 옛날 나쁜 습관에 젖어 잘못된 행태를 반복했다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 분들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성과는 따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박근형은 미투 운동으로 인해 연극을 찾는 관객들이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학로 극장은 관객이 없어 초토화되고, 국'공립극단의 연극마저 외면받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일부의 잘못을 마치 연극계 전체로 폄하하는 분위기는 사그라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 사회에 곪아 터져야 할 부분이 봄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데, 성폭력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자성해야 한다"며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진통으로 여기자"고 총평했다.
◆'반월당 곡주사'와 '봉기'
박근형은 상복이 터진 남자다. 연극 '청춘예찬'으로 시작된 수상은 1999년에 청년예술대상 희곡상, 연극협회 신인 연출상, 평론가협회 작품상, 젊은 예술가상, 2000년에 백상예술대상 희곡상, 동아연극상 작품상'희곡상, 평론가 협회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2003년에 동아일보 차세대를 이끌고 갈 연출가 1위, 2006년에 대산문학상 희곡 부문 수상으로 이어졌다. 이 정도 수상 경력이면 대한민국에서 주는 상이라는 상은 다 휩쓸었다고 보면 된다.
2002년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지만, 이내 서울예대 교수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연극판에서의 화려한 이력과 실무 경험은 강단에 서기에 충분했다. 그는 젊은 시절 연극판 현장을 누비며 당초에는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재능이 너무 떨어진다고 판단해 결국 어깨너머로 배운 연출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삶=연극'이라는 맘으로 열심히 작품 연출에 매진해 '박.근.형'이라는 이름 석 자를 대한민국 연극계에 새겨 넣으며, 현재도 연출가의 길을 걷고 있다.
박근형은 '술'을 참 좋아한다. 그가 술을 사랑하고, 술도 그를 따라다닌다. 연출 작업이 끝난 후에는 항상 술판의 중심에 있다. 그는 술 자체도 좋아하지만 술로 인해 사람과 소통하는 것을 더 즐긴다. 그렇다고 술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써 술의 기능에 대해 적극 지지하고 실천하는 애주가로 보면 정답일 것 같다. 이런 술에 대한 철학 때문에 이번 대구시립극단의 정기공연 연출을 맡았을 때도 단원들과 함께 팔공산에 가서 회식을 하고, 봄 미나리를 같이 먹으면서 화합의 술을 곁들였다.
박근형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궁금해서 '앞으로 뭐 할 겁니까'라고 묻자, '반월당 곡주사'와 '봉기'(가제)라는 뜬금없는 대답을 했다. '그게 뭔데요'라고 재차 물었다. 그러자 "두 작품 모두 인간에 관한 겁니다. 국가나 이념, 제도와 법을 넘어서는 휴머니티가 있어요. '반월당 곡주사'는 대구 얘기예요.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반월당 곡주사 다락방에 숨어 시대에 항거한 학생들의 애틋하고 순수한 이야기가 있는데, 대구의 안희철 작가에게 극본으로 써보라고 청탁했습니다. 제가 연출을 맡으면,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봉기'는 '벌떼 봉, 일어날 기'로 녹두장군 전봉준이 자신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준 가난한 한 가족에게 '날 밀고해서 현상금으로 저 아이를 키워라'고 한 가슴 시린 이야기가 주된 스토리입니다."
박근형 인생 스토리의 마지막 메시지는 '제 삶은 곧 연극'이었다. 그에게 연극판이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무대를 살펴보든, 연기 지도를 하든, 스태프들과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말과 행동은 청산유수처럼 자연스레 흐른다. 마치 제 집에서 편한 옷차림으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할 일을 하는 안방마님처럼. 대구시립극단 단원들에게도 연습기간 내내 같은 메시지를 강조했다. "자기 배역을 소화했다면, 무대를 실컷 즐기세요. 안방처럼. 배우가 불편하면, 관객은 눈을 어디다 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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