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과 나눈 대화] (3) 문경 가은양조장

입력 2018-03-09 00:05:00

광부들의 애환 씻어낸 막걸리 익어가던 곳

문경 가은양조장의 현재 모습.
문경 가은양조장의 현재 모습.

1938년 탄광과 함께 문 열어

당시 읍내 유일한 2층 구조물

'탄가루 씻어내는데 효과' 설

하루 최대 500말 팔리기도

탄광 쇠락'이종주류 등장에

2010년 역사 뒤안길로 퇴장

지난해 문경시가 사들이며

근대문화유산 선정 새 생명

소백산맥 줄기 희양산 남쪽에 '가은양조장'이라고 있다. 문화재청이 지정한 근대문화유산이다. 막걸리 만들다가 문 닫은 흔하디 흔한 양조장 중 한 군데가 아니겠구나 싶어 바깥을 둘러보니 곳곳이 깨지고, 흘러내리고, 터져 나가 있었다. 막걸리를 받으러 뻔질나게 문턱이 닳도록 오가던 사람들이 없어지고서야 양조장 문턱은 정말로 사라졌다.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건물은 역할을 잃으면서 뜻하지 않게 다윈의 용불용설을 입증했다.

'한때 잘 나갔다'는 표식처럼 볏짚과 진흙을 재료로 한 흙벽돌이 건물 바깥에 드러나 보였다. 박제된 동물의 눈알처럼 광택을 잃은 흙벽돌은 그러나, 가은읍의 팽창을 알리는 초석이었다. 1938년 일산화학공업이 은성탄광 개발에 착수하던 그 해였다.

이곳은 은성탄광의 배후시설이었다. 2주 뒤 이 코너에 소개될 가은역, 불정역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자원 수탈 창구와 부대시설들'쯤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근래에 신도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들어서는 건 밥집과 교회라고 하나, 2015년 도청신도시도 이런 배후시설 팽창의 순서를 지켰다. 1938년 탄광이 문을 열면서 함께 문을 연 건 양조장이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침체기도 잠시. 전후 읍내는 다시 사람들로 붐볐다. 높은 급여를 노린 일꾼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탄광은 이들의 노고를 달래줄 술이 필요했고, 술은 안주를 불러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내놓는 술집이 또 필요했고, 술집들은 고객의 주머니를 효율적으로 열고자 접대여성들을 필요로 했고, 그렇게 이름을 떨친 술집 대성관, 송월관, 아천옥 등 50여 개 업소는 1970년대까지 성황리에 손님을 맞았다. 돈이 넘쳐나는 곳에는 어김없다는 유흥과 소비의 사이클이었다.

"많을 때는 하루 500말도 팔렸다. 1말이 20리터다"라던, 전 양조장 운영자 강용우(85'전 문경향교 전교) 옹의 말을 듣자니 요즘 시판되는 1.2리터 들이 막걸리로 환산하면 8천 병인데 인구 2만 명을 유지하던 이 동네는 막걸리 용도 다변화의 선구적 마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요리나 목욕 등에 활용했을 수도 있지 않냐는 합리적 의심이라 여기며 혹시나 싶어 물어보니 술의 1차적 용도, 음주용이었을 거라는 강한 추측이 돌아왔다.

당시 부산사세청(국세청의 옛 이름) 관계자가 던진 "경상도에서 가장 술이 많이 팔린 곳이 가은읍이다"라는 귀띔에 근거한 통계, "목에 낀 탄가루를 씻어내리는 데 막걸리가 좋다"며 마셔대는 광부들의 술집 출입 빈도가 추측의 근거였다.

1967년 즈음으로 가은읍의 인구는 2만4천 명을 넘어 정점에 이른다. 그러나 소주와 맥주라는 이종주류의 등장에 1차 폭탄을 맞고, 탄광의 쇠락이라는 결정타로 양조장의 역할은 2010년 끝을 맺는다.

문경선 철로로 들어오고 나가는 물자와 석탄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가은읍의 호황과 흥청망청의 모든 과정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으로, 옛날 기록사진에나 읍내 유일의 2층 구조물로서 위용을 드러내던 가은양조장은 지난해 6월 4억원에 가까운 가격으로 문경시에 팔려 그해 말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전국의 근대문화유산 중 양조장 건물은 3곳(양평 지평양조장, 진천 덕산양조장, 문경 가은양조장)인데 개중에 2곳은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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