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금호강시대]<9>비파소리 같은 물길 선인의 향기

입력 2018-03-08 00:05:01

연경서원·아양루·부강정…古典이 다시 흐른다

이락서당.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이락서당. 정운철 기자 woon@msnet.co.kr

굽이쳐 흐르는 300리 물길. 절경에 반한 선비들은 이곳에서 공부했고, 쉬었고, 취했다. 휴식 공간이자 학문 연마의 도량이었던 누정(樓亭)과 수려한 경관을 병풍 삼아 선유(船遊) 문화는 강안문학의 뿌리가 됐다. 강정과 무태를 잇던 뱃길은 끊어지고 선사 나루터는 자리만 남았다. 유람하던 선비들이 모여 시를 읊던 부강정과 세심정, 대구 최초 서원이던 연경서원은 원형을 잃었다. 뱃길을 따라 불었던 문풍과 풍류는 옛사람과 함께 떠났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남아 금호강 시대의 부활을 예고한다.

◆공론을 주도한 서원

사가 서거정(1420~1488) 선생이 문형(文衡)을 맡는 등 조선 전기 대구에도 출중한 유학자가 있었지만, 서거정은 일찍 상경해 후학을 길러내지 못했다. 대구를 '내 고향'이라고 부르며 고향 출신 인재를 중용하고 싶었던 그의 꿈은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서야 이룰 수 있었다. 예안에서 만개한 퇴계 성리학은 낙동강을 따라 건립한 서원과 누정(樓亭)에 사연을 담아 금호강에 흘러들었다. 경관이 좋은 금호강을 따라 지어진 정사(精舍)는 학문 강론과 수학의 장이 됐다. 연경서원을 창건해 후학을 기른 매암 이숙량, 퇴계에게 수학하고 돌아와 연경서원 창건을 주도하고 계동정사에서 제자를 기른 계동 전경창, 금호강 하류 사수(泗水, 대구 북구 사수동)에서 인재 양성에 힘쓴 한강 정구 등이 대구 유학의 공론을 주도했다.

대구 수성구 성동 서원골 야산자락에는 남천(南川)과 고산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산서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강학했던 퇴계 이황(1501~1570) 선생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퇴계의 친필인 '구도'(求道)라는 편액이 있으며, 선생의 수식목(느티나무)을 만나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강서원은 고운 최치원이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기 전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선사재(仙槎齋)의 근처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서원이다. 천 년 사찰 선사사(仙槎寺)가 왜란에 불타 폐허가 된 곳에 낙재 서사원 선생이 건립한 곳이다. 낙재는 이곳에 '완락당', '동경재', '서의재' 등을 짓고 연못과 돌다리를 만들어 정구, 장현광, 곽재겸, 손처눌, 도성유 등와 교유하며 강학했다.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지만 강당인 완락당과 동'서재, 이락루가 남아 전란을 겪은 지역 선비들의 배움터를 확인하게 한다.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강학을 한 것은 1563년 연경서원(硏經書院)을 건립한 이후다. 연경서원은 대구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일찍 수많은 유현(儒賢)을 배출했다. 지금은 사라져서 문헌과 기와 조각을 통해 대구 북구 연경동과 동구 지묘동의 경계에 있는 화암(畵巖)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할 뿐이다. 연경서원은 현재 복원을 추진 중이다. 2012년 학적부 격인 통강록을 발견한 데 이어 2016년 사당 건립 당시 이숙량과 이황이 남긴 기문 편액 2점을 찾으면서 서원 복원에 탄력이 붙었다. 중건추진위는 경관을 활용해 성리학의 상징적 공간과 서원의 교육 기능을 되살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옛 선비, 누정에 올라

산과 들이 품고 하늘과 땅이 감싼 곳, 잔잔한 물가에는 누정(樓亭)이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누정은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다.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를 지면보다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 집은 예부터 연희와 유흥의 공간이다. 벽이 없고 기둥과 지붕만으로 사방이 막힘 없이 탁 트여 있다. 산수 좋고 높은 곳에 세워져 경관을 조망하고 휴식을 취하며 시를 읊는 곳이 바로 누정이다. 산이나 언덕이 있으면 자연히 물이 흐르니 금호강변은 누정을 건립해 글을 짓고 뱃놀이하기에 최적이었다. 윤대승의 부강정(浮江亭), 낙애 정광천의 아금정(牙琴亭), 낙포 이종문의 하목정(霞鶩亭), 태암 이주의 환성정(喚惺亭), 세심 전응창의 세심정(洗心亭), 송담 채응린의 소유정(小有亭)과 압로정(狎鷺亭) 등이 당시 지은 대표적인 정자다.

동촌유원지는 예부터 지금까지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휴식 공간이다. 이곳에 대구에 몇 안 되는 누각, 아양루가 있다. 영남 사림의 후예가 결성한 아양음사 회원들이 광복 직후 지은 것으로, 선인의 숨결을 느낄 수는 없지만 비교적 잘 보존, 관리된 곳이다.

영남 제1의 정자였던 압로정(대구 북구 검단동)과 소유정은 채응린이 지었다. 채응린은 강호지락(江湖之樂)에 심취해 두 정자를 짓고 은거하며 여러 유생과 어울렸다. 소유정은 소실됐지만, 소실과 중건, 중수를 거쳐 압로정은 남아 탈속의 세월을 말한다.

압로정을 지난 금호강 물살은 대구 북구 동변동 화담마을을 지나면서 더뎌진다. 다시 흐른 물길은 옛 세심정(洗心亭) 자리와 나루터에 이르러 시문과 풍류에 갇힌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기문이나 상량문도 남아 있지 않아 전해지는 시문으로 겨우 위치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연경서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정구,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등 지역 문사들은 연경서원에서 강론이 끝나면 세심정 아래 나루터에 들러 옥류(玉流)를 타고 길을 떠났다. 달빛 비치는 밤에 노를 저어.

이강서원을 둘러보고 강창 매운탕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다면 이제 금호강의 끝이 보인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있다. 합수되기 전 두 강을 조망하는 곳에도 정자가 있었다. 마치 물에 뜬 것 같다 하여 부강정이라 이름 붙였다는 곳이다. 강정마을과 강정고령보에 쓰인 지명도 부강정에서 유래했다. 기약 없이 만나 배를 띄워 강을 유람하고 부강정에 올랐던 선비들은 경관을 벗삼아 수십 편의 시를 써내려갔다. 대구 달성군은 지난해 조선 학술 문화의 장이었던 부강정을 복원할 계획을 세웠다. 강정고령보 앞에 팔각정 형태로 지어 디아크, 사문진 나루터와 연계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뱃길 따라 한 구절

금호강은 호수처럼 잔잔한 강에 바람이 불면 강변의 갈대밭에서 비파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소리가 들린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빼어난 풍광은 강변 정사(精舍)와 정자(亭子)에 머물던 선비들을 불러들였다. 신라 말 대학자 고운이 마천산에 머물며 벼루를 씻었던 못이 있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은 그가 이곳에서 많은 시문을 남겼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서거정은 대구 제일경으로 '금호강 뱃놀이'(琴湖泛舟)를 꼽았다. 대구에서 경치 좋은 10곳(大丘十詠) 중 처음으로 꼽을 만큼 풍광이 아름답다고 전해지는 이곳은 동촌 해맞이 다리와 아양 기찻길 일대로 추정된다.

琴湖泛舟(금호범주)

琴湖淸淺泛蘭舟(금호청천범난주) 금호강 맑은 물에 조각배 띄우고

取此閑行近白鷗(취차한행근백구) 한가로이 오가며 갈매기와 노닐다가

盡醉月明回棹去(진취월명회도거) 밝은 달에 흠뻑 취해 노 저어 되돌아가니

風流不必五湖遊(풍류불필오호유) 오호가 어디더냐 이 풍류만 못하리

서거정이 읊은 풍광은 수 세기가 지나도록 변함이 없었음이 틀림없다. 낙재 서사원과 여헌 장현광 등의 금호강 뱃놀이는 이들이 남긴 시문을 문집으로 엮은 '낙재선생문집'과 여대로의 '금호동주시서'(琴湖同舟詩序)로, 또 그 모습을 그려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로 남았다.

절경은 16, 17세기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모래가 펼쳐지고,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던 곳에서 학문은 무르익었고, 강안문학은 꽃을 피웠다. 달성군 서재 성균진사 도석규 선생은 금호강이 호수처럼 펼쳐져 선경을 이룬다 하여 강 하류지역을 중국 저장성 항저우의 서호(西湖)에 빗대 '서호병 10곡'을 남겼다. 이 가운데 첫째 굽이는 부강정, 둘째 굽이가 이락서당이다. 물길로 세곡을 나르고 소금배가 오고 갔던 강창의 풍광 뛰어난 파산 자락에 이락서당이 자리 잡았다. 한강 정구 선생과 낙재 서사원 선생에게 배웠던 후학이 뜻을 모아 건립한 배움터다.

선현의 학풍을 이어간 인재들이 배출돼 대구를 교육문화도시로 불리게 할 근저를 이룬 금호강. '강안문학의 요람'이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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