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광의 에세이 산책] 제대로 된 반란

입력 2018-03-06 00:05:04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김일광 동화작가
김일광 동화작가

아들 내외가 동시에 출장이라며 조심스럽게 손자를 부탁해왔다. 아침에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다가 저녁 무렵에 데려와서 함께 지내면 된다고 하였다. 우리 내외는 기꺼이 허락했다. 손자를 독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아들 내외를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며느리는 우리와 아이가 먹을 음식은 물론 집안 살림살이 활용 방법 등을 일일이 메모해 두었다. 아이를 맡긴 며느리의 미안해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손자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아파트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평생을 주택에서 살아온 우리에게 아파트는 답답함 그 자체였다. 창을 열어도 보이는 대상은 발을 내딛고 다가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아득히 먼 허상과도 같았다. 언제든지 마당으로 나가서 만지고 느끼고 기대던 자연이 아파트에서는 그저 그 먼 곳에 무심히 설치된 조형물 같았다. 보이는 사물이 우리네 삶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존재, 결국 내 삶과 유리된 대상에 불과했다. 어린 손자가 그런 관계에 익숙해지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아내와 나는 의기투합하여 반란을 시도하였다. 손자를 밖으로 빼돌리기로 했다. 아들 내외가 퇴근하면서 데리고 오던 시간에 비하여 한참 일찍 손자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왔다. 무작정 손자를 유모차에 태워서 햇살 좋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그 길 끝에 작은 하천이 나타났다. 요즘은 지역마다 하천 가꾸기 사업이 참 잘 되어 있었다. 산책길을 물 가까이 만들어 두었다. 아이는 답답한 유모차에서 내려달라고 발을 뻗댔다. 전들 그런 길을 걷고 싶지 않았을까. 유모차에서 벗어난 아이는 신이 나서 잘도 걸었다. 우리도 아이의 걸음에 맞추느라 보폭을 줄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음에서 풀려난 개울물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렸다. 그 물을 따라 오리 한 쌍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갯버들이 움을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그동안 차 소리만 들렸는데 그게 아니었다. 단지 손자 아이를 따라 걸음만 늦추었는데 회색빛 존재들이 푸르게 살아나고 있었다.

갑자기 두껍게 걸친 외투가 짐스러워졌다. 봄이 와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미 봄이었다. 자연은 제때에 맞추어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때를 따라가지 못하고 늘 허둥대는 꼴이다.

하천으로 또 한 쌍의 오리가 날아왔다. 물고기들이 흩어진다. 회색빛 도시 공간에 흘러가는 물이 있고 푸른 생명들이 계절을 맞고 있다는 게 신비롭다. 아이의 가녀린 손가락이 가리키는 갯버들 잔가지 빛깔이 유난히 푸르다. 아이가 생명과 새롭게 관계를 형성해 가는 모습이다.

하늘이 내려와 앉은 맑은 물을 바라본다. 어느새 다가온 새봄, 생명들과 더욱 친밀해진 느낌이다. 인생의 봄이라고 할 수 있는 어린 손자와 함께 생명을 체험한다. 제대로 된 반란이었다.

김일광 동화작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