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 대군도 넘지 못했던 고구려 산성의 비밀…『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입력 2018-03-03 00:05:04

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원종선 지음/ 통나무 펴냄

7세기 중국 대륙을 평정한 수양제는 낙양-양주-북경-강남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한다, 총 거리만 1천784㎞. 운하 완공 후 용주(龍舟)에 올라탄 양제는 선단과 인마를 이끌고 운하를 직접 돌아본다. 치세(治世), 물류, 수리 관개 등 여러 목적이 있었지만 수양제 운하 건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병참수송로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612년 113만 명이라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가 드문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동정(東征)에 나섰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33년 후 당태종 역시 친히 정벌에 나서 요택(遼澤)을 건넜지만 안시성을 넘지 못하고 패주하고 만다. 저자는 그 비밀을 고구려의 산성(山城)에서 찾고 있다. 평지가 아닌 산지에 축조해 이수난공(易守難攻'수비는 쉽고 공략은 어려움)의 득을 취하고 산지 성곽을 정략적으로 연결해 연합방어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동반도 고구려 산성 73곳 답사기록=이 책은 재중(在中) 사업가 원종선 씨가 요동반도에 포진해 있는 73개의 고구려 산성을 두 발로 뛰어다닌 답사기록이다.

저자를 처음 역사로 이끈 건 '최부 표해록 평주'(2002)였다. 조선 성종대 관리 최부의 표해록을 따라 3, 4년 동안 운하를 따라 답사기행을 계속하던 저자는 여러 역사적 사실과 정황을 종합하면서 중국의 운하는 고구려 정벌용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추앙받는 수양제'문제, 당태종도 고구려의 군사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는 사실. 그 '비밀'을 고구려 산성에서 찾은 저자는 성곽이 밀집돼 있는 요동반도 대련(大連)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산성 답사에 나섰다.

요동의 성터 하나하나를 답사하며 찍은 수많은 현장사진을 수록해 이해를 돕고, 현지의 지형과 지도는 직접 그려 설명을 덧붙였다. 중국 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참고했고, 주민들과 인터뷰를 통해 현지에서 통용되는 지명, 전해오는 민담까지 채록했다.

도올 김용옥은 추천사에서 "일제가 우리 강토 강점의 야욕을 드러내는 시절부터 많은 학자들이 고구려성의 존재를 확인해왔으나, 한'중'일을 통틀어 이만큼 철저한 탐사기록을 담은 책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요동반도는 중원 패권의 중요 관문=저자가 답사한 고구려산성은 주로 요동반도에 위치한 산성이다. 현재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동북3성 안에 200여 개, 그 중 요녕성(遼寧省) 안에만 100여 개의 고구려산성이 분포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보통 요하를 기준으로 서쪽을 요서,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데 요동반도는 압록강 하구 단동(丹東)에서 요하 하구에 이르는 축을 북쪽 한계로 하고 황해와 발해를 끼고 있는 반도를 말한다.

그러면 전략적 개념에서 요동반도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원세력이 동쪽으로 확장할 때 반드시 요동이라는 관문을 통과한다. 해양세력이 북진할 때도 요동은 제1의 거점지역으로 작용한다. 요동에 수백 개의 고구려산성이 밀집해 있는 이유는 요동반도야말로 방어의 핵심이요 전략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요동반도의 지정학적 유리와 고구려산성의 전략적 가치를 확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이지만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던 문제 즉, 어떻게 고구려가 당시 세계 최강 수'당제국의 막강한 대군의 침입을 막아내고 대륙의 강자로 우뚝 설 수 있었는지 그 비밀에 다가갈 수 있다.

◆고구려 고성(古城) 훼손 갈수록 심각=당시 전쟁 양상이나 작전 방식은 요즘과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 고구려의 국토 방위개념은 정규군을 국경선에 배치하는 현대적 개념이 아니고, 지역마다 적합한 장소에 산성을 쌓아 적군의 침입 시에 인원과 물자를 집결시켜 성을 지켜내는 농성(籠城) 방식이었다.

주지하듯 산성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적을 물리치는 '비대칭 전략'의 핵심 중 하나다. 인근 산성과 연계해 산성을 포위'공격해오는 적군의 배후를 다른 산성에서 공격하는 게릴라전술도 가능하다. 또 적군의 보급로를 다른 산성에서 끊어줄 수 있기에 전체 전략으로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방어 전략에 있어서 요동반도의 특징은 내륙으로 침략해오는 적군을 막아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해양을 통해 침투하는 적을 막기 위한 대비도 동반된다. 즉 강의 중'하류에 다수의 산성들을 쌓음으로써 수륙(水陸)과 산성들을 연계한 수비 전략이 가능했던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산성의 성벽을 포함한 많은 고구려 유적들이 점점 훼멸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요동엔 고대 성터 등 실증적 사료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며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고구려산성의 실상이야말로 곧바로 우리 현존의 핏줄임을 말해주는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성벽의 훼손은 고구려 정신의 훼손이고, 성터의 붕괴는 민족사학의 위기인 것이다. 저자는 올바른 고구려사를 후세에게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민족의 흔적이 더 없어지기 전에, 현 상황이라도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지금도 요동의 벌판과 산악을 누비고 있다. 519쪽, 2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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