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오래전의 일이다. 정확한 시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30대 여성이 과거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뒤늦게 털어놓는 자리였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그녀가 인터뷰 내내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은 아직도 선명하다. 마치 속죄하는 것처럼 그녀는 죄책감에 억눌려 있었다. 피해자인데도 그런 모습에 무척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은 불편한 범죄다. 뿌리깊은 가부장적 시선에 피해자라고 밝히는 순간 '주홍글씨'가 뒤따를 수 있어서다. 보이지 않는 보복이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사회 전반의 '성폭력 프레임'은 여전히 굳건하다. 피해자들은 그 속에 갇혀 가슴속에 충격과 분노를 켜켜이 쌓아둔 채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에서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성폭력 고발 운동)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포털사이트에는 피해자라 주장하는 인물과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온다. 미투 운동은 대형 이슈인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리는 기간에도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며 그 열기를 실감케 했다.
이번에 불거진 미투 운동의 진원지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가해자가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법조계나 문화예술계, 연예계 등. 자칫 피해 사실을 공개했다가는 시쳇말로 '그 세계에 발붙일 수 없기에' 섣불리 잘못이라고 항변하지 못하는 곳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 중 대표적인 이가 이윤택 전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다. 이 씨는 한국 연극계에서는 '전설'로 통한다. 그가 이끄는 연희단거리패는 연극계는 물론, 영화계를 주름잡는 배우들을 줄기차게 배출하는 사관학교로 불린다. 그의 한마디는 곧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 한때 연희단거리패에 있었던 한 배우의 소회는 이를 짐작게 하고도 남는다. 그는 "이윤택 대표는 대한민국 연극계에서 가장 높은 분이고 내가 어느 극단에서 연극을 해도 '저놈은 잘라'하면 잘리는 정도의 파워를 가진 분"이라고 했다. 절대적인 그에게 피해 여성들이 최근 '미투'를 외쳤고 결국 그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사과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성폭행 의혹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어 논란은 진행 중이다.
미투 운동은 사회 곳곳으로 전파되고 있다. 종교계는 물론, 대학사회로도 확산되고 일반인들도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대구의 모 커뮤니티에는 한 회원이 어렸을 때 당한 성추행 이야기를 꺼내자 자신도 성폭력을 당했다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문화예술계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일반 관객들의 '위드유' (with you'당신과 함께하겠다) 집회도 힘을 보태고 있다. 미투 운동이 풀뿌리 운동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이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배경에는 우리 사회를 견고하게 지배하는 '갑을 문화'가 있다. 모두가 알지만 쉽사리 바꾸려고 용기 내지 못하는 적폐가 숨어 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부당하고 강압적인 갑을 문화를 얼마나 많이 겪는가. 미투 운동은 적폐를 고발하는 것이자, 권력을 앞세워 아랫사람을 짓밟는 풍조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운동은 '을'들의 적극적인 공감을 사는 것이다. 혹자는 미투 운동을 혁명이라고도 일컫는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 상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른 현대적 개념의 혁명으로 해석한다.
아무쪼록 미투 운동이 일회성으로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가해자들이 '이 또한 지나간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꾸준히 이어졌으면 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무서워 응어리를 가슴속에 묻고 사는 많은 여성이 당당해질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나아가 미투 운동이 불쏘시개가 돼 온갖 부당하고 강압적인 '갑을 문화'를 정화하는 시민운동으로 번지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미투 운동을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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