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거짓말 공장

입력 2018-02-20 00:05:00 수정 2018-05-26 21:57:07

얼마 전 대학교수 출신 어르신과 나눈 대화다. 그분은 필자에게 "풍계리를 아느냐"고 물었다. 북한 핵실험장이 있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는 시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장소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그곳을 타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처음 듣는 황당한 뉴스에 필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더니, 그분은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이스라엘 특공대가 풍계리를 폭파시켰는데, 바로 다음 날 김정은이 평창올림픽을 들먹이며 한국에 대화를 제안했다고 하네."

전형적인 가짜뉴스였지만, 그분의 말씀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헨리 키신저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데 조만간 미군은 철수하고 미국은 북한을 타격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쫓겨날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궁금증이 일어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정보를 들었느냐고 캐물었다. 며칠 전 업무차 서울에서 만난 70대 장군 출신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연세가 좀 많다고는 하지만,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 출신과 국방부 주요 보직을 거친 장군 출신이 '이스라엘 특공대'를 믿고 언급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가짜뉴스 신봉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아무리 황당한 소설 같은 얘기라도 자신의 생각과 비슷하면 '옳거니' 하고 믿어버리니 어떻게 설득할 방법이 없다. 40, 50대만 해도 가짜뉴스를 그리 많이 믿지 않지만, 60대 이상 연령대에는 신봉자가 수두룩하다. 어르신들과 가짜뉴스를 놓고 논쟁을 벌이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해 모른 체하는 것이 편하다. 모두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있으니 토론과 논쟁은 더는 소용없는 세상이 된 듯하다. 21세기라면 인간의 이성과 상식이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한 것 같은데, 거꾸로 퇴보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전 세계적으로 가짜뉴스가 사회문제화돼 시끄럽지만, 한국만큼 그 정도가 심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진보·보수로 갈려 이념대립이 심각한데다 한국인 특유의 거짓말과 허세, 디지털 기술까지 더해져 갈수록 그 위세가 대단하다. 지난해 말 한 방송사가 '시청자들이 뽑은 2017년 올 한 해 최악의 가짜뉴스 10'을 방송했을 정도이니 그 폐해와 파급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가짜뉴스를 마구 찍어내는 곳은 극우세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전에는 진보세력도 비슷했다. 2008년 광우병 사태는 한국에서 가짜뉴스가 처음으로 위력을 발휘한 때였다. 인터넷에는 연일 미국산 쇠고기를 먹으면 어떻게 되고, 광우병에 걸리면 어떻게 되느니 하는 글이 올라왔다. 이명박 정권을 미워하고 미국을 싫어한 진보세력이 광우병 문제를 왜곡·과장했고, 대규모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당시 주장·목소리 가운데 맞는 것이 거의 없는 걸 보면 가짜뉴스의 전형이다.

가짜뉴스는 소수파 정치세력이 정권 탈취나 세력 확장을 위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거짓말로 정권과 집권층을 욕하고 비방해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일종의 사기행위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달부터 '가짜뉴스 신고센터'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일주일 만에 2천 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왔다니 가짜뉴스의 전파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가짜뉴스를 마구 찍어내는 공장은 곳곳에 널려 있다. 익명의 가면을 쓴 채 숨어서 가짜뉴스를 만드는 행위는 범죄다. 교묘한 거짓말로 집단과 세대·계층을 반목하게 하고, 특정인을 증오하게 만들고, 이웃을 공포에 떨게 하는 이들은 '열린 사회의 적'이다. 가짜뉴스에 동조하는 행위는 자신도 모르게 범죄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정치적 측면에서 소통과 직접민주주의 확대를 가져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거짓말과 잘못된 정보를 확산시키는 걱정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정권과 힘센 자, 기득권층에 대한 비판과 견제는 꼭 필요하지만, 거짓과 속임수로는 안 된다. 정직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