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고 싶은데…날 포근히 감쌀 안식처 없을까
"쉬고 싶죠. 시끄럽죠, 다 성가시죠, 집에 가고 싶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을 거야."
가수 자이언티의 '꺼내먹어요'라는 노래의 가사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살면서 이런저런 고충들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면 정말 포근한 나만의 피난처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다. "아무것도 안 하지만 좀 더 강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를 외칠 정도로 강렬한 피로감에 찌들어 사는 현대인. 그렇다 보니 '케렌시아'(Querencia)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투우 소 최후의 보루, 케렌시아
스페인어로 애정·귀소본능 의미
김난도 교수 올 소비 키워드 꼽아
치열한 삶…에너지 비축 공간 필요
수도권엔 이미 다양한 공간 생겨나
스페인어인 케렌시아의 사전적 의미는 애정, 애착, 귀소본능이란 뜻으로 안식처, 피난처 등에 자주 쓰인다. 이 단어는 원래 투우장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다. 투우장에 맨 처음 들어선 소는 넓은 투우장을 휙 둘러보면서 자신이 쉴 곳을 살피고 미리 정해둔다. 그리고 투우사와의 싸움에서 지치거나 죽음이 예상되는 순간이 오면 자신이 정한 안식처로 이동해 숨을 고르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한다. 그곳이 바로 케렌시아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와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케렌시아를 2018년 소비 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전장에서 홀로 마음을 가다듬고 에너지를 비축하는 그런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대구에는 많지 않지만, 서울 수도권에서는 이미 대중화된 '수면카페'가 케렌시아를 즐기는 현대인의 좋은 사례다. 일명 '낮잠카페'라고도 불리는 수면카페는 계속되는 야근과 잦은 회식 등으로 피로가 누적되면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직장인들이 주 고객이다. '낮잠영화관'도 등장했다. 서울 여의도의 한 영화관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시에스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침대처럼 180도 젖혀지는 좌석과 함께 클래식 음악, LED 촛불, 허브차, 담요, 귀마개, 안대, 슬리퍼까지, 낮잠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휴식을 즐기는 이들도 많다.
각 가정의 인테리어 트렌드도 케렌시아를 추구한다. 정서적 만족감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보다 적극적인 휴식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거실의 조도를 낮추고 카페와 같은 은은한 분위기에 음악감상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꾸민다든가 화분으로 가득 채운 베란다, 만화방처럼 꾸며진 서재 등을 만드는 이들이 늘고 있다.
케렌시아가 꼭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람도 좋고, 취미생활도 케렌시아가 된다. 가족은 누구에게나 최고의 케렌시아다.
여행을 위안으로 삼는 직장인들도 많다. 특히 최근에는 혼밥, 혼술 등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늘게 되면서 여행시장에도 자연스럽게 영향력을 미쳐 '혼행족'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한 대형 여행업체에 따르면 지난해 패키지 1인 예약자는 연평균 45%, 항공권 1인 발권 수는 27% 증가했다. 또 다른 업체 역시 2016년과 비교해 1인 항공권 예약률이 21% 증가했으며, 심지어 패키지 투어가 대부분이었던 40, 50대들도 혼자 여행을 즐기는 비율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오롯이 나만의 세상을 찾아서
피로 누적 직장인 '수면카페' 애용
침대같은 좌석 '낮잠영화관' 등장
익명의 SNS공간도 피난처 사용
'대나무숲' '블라인드' 앱 큰 인기
어디로 떠나거나 취미, 혹은 혼자 있을 여유조차 없는 이들은 익명의 SNS 공간을 일종의 케렌시아로 삼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대나무숲'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대나무숲 같은 익명의 공간에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다.
특히 회사에 대한 말 못 할 고민이나 불만사항 등을 익명으로 마음껏 털어놓고 하소연할 수 있는 '블라인드' 앱은 지금까지 50만 건 넘게 다운로드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같은 회사 직원끼리, 혹은 같은 업계 종사자끼리 계급장 떼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장소다.
일터에서도 최소한의 안정감을 추구할 수 있다. 바로 '데스크테리어족'이다. 책상과 인테리어의 합성어로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인 사무실 책상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꾸미는 것이다. 특히 아기자기한 소품을 좋아하는 젊은 여성 직장인들 덕분에 각종 디자인 문구 판매도 인기다.
케렌시아가 올해의 중요한 소비 키워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부각된 것은 우리나라가 과열된 경쟁 속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없이 내달려야 하는 극한의 경쟁사회이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스트레스를 피할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는 것이다.
어떤 형태이든 결국 케렌시아의 핵심은 '자기집중'이다. 집이든 회사든 온전히 자기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이 포인트다. 너무 바빠 정말 작은 여유조차 찾기 힘들다면 출퇴근 길 운전하는 차 안에서나, 버스 좌석에 앉은 시간만이라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토닥여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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