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2월에 부는 바람

입력 2018-02-19 00:05:00 수정 2018-10-17 11:15:36

겨울의 마지막 달인 2월은 봄을 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남녘으로부터 올라오는 성급한 봄소식을 전해주는 달이기도 하다. 2월에 부는 바람은 아무리 세차도 애써 숨을 고르며 훈훈하다고 느낀다. 동네 공원의 거무스레한 나무 표피도 조금씩 맑아지고, 수액의 흐름도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을 엿듣는다. 껴안은 나무가 살아있음을 알 때, 한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한겨울을 넘어온 나무가 대견해 보인다. 움츠리고만 있던 몸을 곧게 세우는 2월이다.

겨울이라 갇혀 지내다가 갑갑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울산 대왕암 공원으로 달려갔다. 울산은 20여 년을 산 곳이라 낯설지 않아 한 번씩 찾는 곳이다. 한파가 곧 닥칠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어 그 사이에 다녀오리라 했다. 오후 3시에 출발해서인지 도착한 그곳은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해안가인데도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바람 한 점 없는 보드랍고 따뜻한 밤이 열리고 있었다. 해송이 드리워진 해안 공원길은 흑백사진을 넣어 둔 한 장면의 액자 같았다. 등대는 먼 곳으로 불빛을 쏘고 있었고,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해초들의 상큼한 향내를 머금은 바다 냄새가 가슴속 깊이 스며 들어왔다. 둥근 달과 고요한 해안이 더욱 분위기를 자아내어 순간적으로 울컥했다.

대왕암까지는 가로등이 설치되어 밤에도 거닐 수 있었다. 보통 날에는 바람이 세차 머리카락이 동서남북으로 날렸는데, 이날만은 바람조차 잠들어 버린 천국의 해안가에 와 있는 듯했다. 이 공원을 수없이 찾아왔지만 이런 날은 처음이었다. 가까운 풍광들은 보이나 먼 곳은 어둠이 덮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에 봤던 멋진 풍경들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기억으로 어렴풋이 그려냈다. 선명하진 못하나 마음으로 그려낸 풍경화였다. 대왕암 전설에서 역사적 충렬을 본받고, 울기 등대를 바라보고는 길 잃은 배만이 아닌 마음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게도 길잡이가 되어 주길 바랐다.

고요한 해안가를 거닐며 파도 소리를 들었고, 잠든 바람 속에서 이미 와버린 봄을 만끽하고 온 나였다. 그날, 방어진항 전통시장이 파하기 전에 바삐 서둘러 서둘러 생미역과 해물들을 사들고 돌아왔다. 생미역은 우리집 빨랫줄에 줄줄이 늘어놓고, 2월의 바람으로 말렸다. 며칠 전, 내 생일상에 올려놓았던 미역국은 방어진 미역으로 끓인 것이다. 방어진은 바람이 많고 파도도 세차, 그 덕에 미역이 굵고 힘이 좋아 맛이 있기로 소문나 있다.

대왕암을 다녀온 다음 날부터 한파는 몰아쳤다. 찬바람이 내 살갗을 스쳤지만 겨울바람 같지 않았다. 짧은 여정이었으나 숨은 봄을 가슴에 담고 와서인지, 겨울은 점점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2월의 바람 앞에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곧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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