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소망으로 쌓아올린 허구의 탑

입력 2018-02-06 00:05:00 수정 2018-05-26 21:57:46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GNP)은 일본의 열두 배에 가까웠다. 군수산업의 기초가 되는 철강이 그랬고, 자동차 보유 대수는 160배, 석유는 무려 776배나 됐다. 일본의 필패는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 군부의 도상연습(圖上演習)에서도 확인된 바였다. 당시 일본 해군대학은 미국과의 도상 전쟁을 몇십 회나 해봤지만, 일본이 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결행했다. 그 무모함의 뿌리는 바라는 대로 될 것이라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진주만 기습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18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총리가 되면서 천황에게 전쟁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 육해군 참모들에게 지시해 만든 '대미영란장(對美英蘭蔣) 전쟁 종말 촉진에 관한 복안'이란 문서다. '미영란장'이란 미국, 영국, 네덜란드, 장제스(蔣介石)의 충칭(重慶)정부-일본은 왕자오밍(汪兆銘)의 친일 난징(南京)정부를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있었다-를 가리킨다.

그 내용은 이렇다. 전쟁 중인 독일과 소련을 중재해 화평을 이끌어내고, 독일의 전력을 영국과 싸움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면 영국이 굴복할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전쟁 의지도 약해질 것이다. 그때 미국과 협상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 현실은 전혀 달랐다. 독일의 전쟁계획에 소련과 화평은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 종결 구상의 핵심인 영국의 굴복 가능성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 문서가 작성되기 1년 전인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패배하면서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포기했다. 전쟁 종결 구상의 전제부터 무너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착각에 대해 일본 역사소설가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추상적인 관념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이성적인 방법론을 전혀 검토하려 들지 않았다. 먼저 자신에게 바람직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능숙한 작문으로 공중누각을 쌓는 것이 일본인의 특기인 것 같다. 모든 일들이 자신이 희망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한다.('쇼와사 1') 일본의 전쟁 계획은 소망으로 겹겹이 쌓아올린 허구의 탑이었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평화올림픽' 구상은 이를 그대로 재연하는 듯하다.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제의로 재개된 남북대화를 모멘텀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구상이다. "평창올림픽을 통해 북한이 예전과 달라질 수 있다.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받고 싶으면 정상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올림픽 기간에 깨닫지 않겠느냐"는 문정인 대통령 안보특보의 '해설'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한마디로 북한이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것이란 얘기다. 소망이 현실을 대체하고 객관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를 주관적 작문이 꿰차는 소망적 사고의 전형이다. 이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문 대통령의 생각을 이렇게 바꿔 표현할 수도 있다. '북한이 변하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올림픽을 통해 정상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생각하는 대로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이 달라질 것이라는 현실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 북한은 핵 보유가 유일 체제 보장에 득이 아니라 해가 된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평창올림픽이 그 계기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상식에 더 부합한다. 오히려 올림픽 참가가 핵무장 완성을 위한 시간벌기라는 의심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평창올림픽은 문 정부에게 잠시나마 소망의 실현이란 꿈에 부풀게 한 단막극일지 모른다. 연극이 끝나고 불이 켜진 뒤 문 정부는 어떤 현실과 마주할까. 그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환멸의 현실일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 개막 하루 전의 평양 열병식은 그 예고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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