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황병기를 추억하며

입력 2018-02-03 00:05:00 수정 2018-10-12 09:48:35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가 1월 31일 타계했다는 소식에 가슴 한쪽이 한동안 먹먹해졌다. 그가 1974년에 발표한 1집 LP '침향무'를 꺼내 들어 턴테이블에 얹었다. 오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의 12현 가야금 소리가 마음을 씻겨준다. 속삭이듯 청아하게, 때로는 질풍노도 같은 울림이다. "아!"

황병기는 원래 법학도였다. 취미로 가야금을 뜯던 그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 중에 KBS 전국 국악콩쿠르 최우수상을 따내며 국악계에 입성했다. 이후부터는 승승장구였다. 그가 걸어간 길은 현대 가야금사의 새 이정표가 됐다. 그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다. 가야금 줄을 첼로 활로 긁는 파격도 시도했다. 그가 1975년 발표한 '미궁'이라는 음악 앞에서는 웬만한 현대실험음악도 무릎을 꿇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누구보다도 전통을 아꼈다. 12현 가야금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과 음악관에서 이를 가늠할 수 있다. 가야금은 본래 12현 악기다. 그런데 국악의 퓨전화가 진행되면서 25현 가야금까지 등장했다. 줄의 수가 많아지면 7음계 표현이 가능해지지만 국악기로서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황병기는 17현 가야금까지만 5음계를 표현할 수 있는 우리 전통 악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만든 곡들은 대부분 12현 가야금 곡이다. 숱하게 파격을 시도한 그의 음악이 전통으로 인정받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필자가 문화부 기자이던 2003년 그는 대구의 170석 규모 소공연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국악계 거장이 그런 장소에서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취재를 해보니 공연기획자와 특별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구에 황병기의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젊은 기획자의 대담한 전화요청에 고민 없이 달려온 것이었다. 덕분에 대구 청중들은 무릎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거장의 가야금 연주를 즐기는 호사를 누렸다.

당시 그가 청중에게 한 말이 뇌리에 생생하다.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음악처럼 허무한 예술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라지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도 언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 순간이 중요하지요."

그가 가야금으로 명상을 한 구도자(求道者)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 삼가 황병기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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