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정치를 꿈꾸다/ 이상우 지음/ 테오리아 펴냄
'극장정치'라는 말이 있다. 극장에서 하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극적인 이벤트 효과를 활용한 정치를 말한다. 예컨대 대통령이 선택한 하나의 이슈를 중심으로 대결구도를 만들고 여론몰이를 하려고 기획한, 대통령 주연'기획'연출의 드라마가 극장정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정치형태에 붙이기도, 북한의 통치행위를 일컫기도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극장처럼 극적인 정치가 극장정치로, 극장보다는 정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주어를 바꾸면 어떻게 될까?
이상우 연극평론가 겸 고려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정치가 아니라, 극장이 정치적 욕망을 어떻게 표출했는지에 주목한다. 책 '극장, 정치를 꿈꾸다'는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전쟁, 분단시대를 겪으며 관객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극장은 어떤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드러내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저자는 극장의 문화정치를 연극과 영화 두 장르로 나누고, 역사, 젠더, 민족주의, 영화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역사극에서 기억의 정치학은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 여배우의 성립과 인식은 젠더 관점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 식민지 시대 민족주의를 극장에서 어떻게 확인할지, 분단 시대 영화와 정치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될지 네 가지로 나눠 정리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본격화했다. 우리말을 쓸 수 없었고, 연극'영화에 대한 검열도 강해졌다. '현실을 이야기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극화할 수 있는 소재는 역사적 인물이었다. 고대사 이야기가 과거 민족에 대한 향수가 되고, '이조'(李朝) 이야기는 원망과 회한의 대상이 되어 역사극의 두 갈래를 형성했다. 한쪽에서는 민족통합의 담론을, 한쪽에서는 조선 쇠퇴 담론을 이야기하는 기억 담론의 투쟁이 극으로 표현됐다. 서술 주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기억은 김옥균에 대한 극단의 시선에서 두드러진다.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김옥균은 독립과 개혁을 주장하며 갑신정변을 이끈 근대개혁운동가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을 꾀했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 이전 그에 대한 시선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일제강점기 작품 속 김옥균은 나운규가 만든 영화 '개화당이문'(1932)에서 보듯 개혁운동가로 그려지기도 하고, 박영호의 희곡 '김옥균의사'(1944)에서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저자는 김옥균을 다룬 문화텍스트가 각기 다른 기억으로 역사적 인물을 서술하고 재현하면서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경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근대국민국가의 왜곡된 성 인식은 여성에게 새로운 잣대로 작용한다. 여배우의 탄생은 윤심덕이나 토월회 여배우의 사례처럼 수많은 난관이 필요했다. 하루아침에 추문의 주인공으로 전락한 화가 겸 문인 나혜석도,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이자 천재로 불린 박인덕도 '조선의 노라'가 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 김명순은 일본 유학 시절 육군사관생도 이응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극단 토월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기진이나 염상섭, 김동인, 전영택 등 남성 문인들로부터 돌아가며 인신공격을 받고 '탕녀'(蕩女)로 낙인찍힌다. 금욕주의적 연애 이상을 추구하는 글을 써가며 자신을 스스로 방어해야 했던 김명순의 상황은 당시의 젠더 인식이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여실히 증명한다.
배뱅이굿'(1942), '맹진사댁 경사'(1943), '한네의 승천'(1972) 등 이른바 '민속의례 3부작'으로 유명한 민족주의 작가 오영진은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다. 저자는 식민모국의 언어로 민족주의를 말하는 아이러니는 단순히 민족을 배신한 활동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일본어가 국어로 강제되는 상황 외에 일제강점하 동아시아 문화블록 내에서의 신질서 편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저자는 '충무로 황제' 신상옥 감독을 분단 체제를 대표하는 극장정치의 주인공으로 꼽았다. 1950, 60년대 '상록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 등 흥행작을 쏟아냈다. 박정희'김종필의 후원으로 안양영화촬영소를 연수하고, 박정희 정권과 밀월관계를 형성하며 영화사 '신필름'을 차리며 할리우드식 영화감독을 건설한 것도 신 감독이다. 그러나 영화계를 대표해 정부의 영화검열정책에 반대하다가 영화 미디어를 권력의 손에 쥐려던 정권과의 갈등과 불화로 몰락했다. 최은희와 비슷한 시기에 실종됐다가 탈북하기까지 북한에서 활동한 그는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20편의 영화를 제작'연출했다. 북한에서 만들어진 그의 영화는 유일사상국가의 체제 선전용으로 이용됐다. 그는 탈남과 탈북을 모두 경험한, 그래서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영화를 연출한 유일한 감독이지만 어디에서도 창작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지는 못했다. 한국 영화사에서의 입지가 약화하고, 북한 영화사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그의 영화는 예술이 정치에 지배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현실을 통해 분단체제가 예술에 가한 억압을 일깨운다.
근대의 극장은 불온한 감각, 음탕한 욕망, 허황한 꿈이 재현되는, 금기와 불온의 공간으로 취급됐다. 숱한 예술가들이 정치적 욕망을 투신한 공간이기에 극장에는 시대 공기가 담겼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던 관객은 작품과 작가, 그리고 극장의 표상에 사로잡힌다.
시대는 다른 방식으로 극장을 공격했고, 극장은 그만의 다른 방식으로 답했다. 그래서 '블랙리스트' 사태는 새삼스럽지 않다. 늘 그래 왔듯 정치적 욕망과 시대적 억압이 뒤얽힌 덤불에서 극장은 새로운 정치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392쪽, 1만9천원.
▷지은이 이상우는…
연극평론가 겸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영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컬럼비아대 객원연구원, 메이지대 문학부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극작가 겸 연출가 유치진을 통해 한국 근대극을 재조명한 '유치진 연구'로 유명하며 '근대극의 풍경' '우리 연극 100년' '영화, 대동아를 상상하다' 등을 공동집필 또는 공동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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