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인성 한중대영베어링 회장
경남 합천에서 기부왕이라 불리는 진인성(64) 한중대영베어링 회장. 28세 때부터 36년간 100억원에 가까운 돈을 고향 합천을 위해 헌신해 온 살아있는 기부의 전설로 불린다. 그런 그가 지난해를 끝으로 경로잔치 행사 후원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합천의 경로잔치 행사는 1년에 17개 읍'면 전체를 돌아가며 17번의 경로잔치를 열기로 유명하다. 합천군의 어르신 대부분이 참여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중심에 그의 후원이 있었다.
"베푸는 것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위는 없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던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그를 찾아가 36년 동안 해온 기부 행위를 중단하는 이유를 직접 듣고 싶었다. 한 작은 시골이 자신의 고향이라며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많은 돈을 꾸준히 기부해 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고향의 어르신들을 위해 베풀 수 있었던 남모를 사연이라도 있는지 들어보고자 했다.
합천군 적중면이 고향인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 16세 어린 나이에 대구로 무작정 상경했다. 서문시장에서 신발가게 점원으로 사회의 첫발을 내디딘 그는 제대 후 포장마차로 오로지 돈을 벌겠다는 각오 하나로 악착같이 일을 했다. 3세 된 딸이 닭똥집 굽는 냄새를 맡고 먹고 싶어 칭얼거리면 손님이 먹다 남기고 간 닭똥집 한 조각을 발라 입에 넣어줬다고 한다. 60원에 닭똥집을 사서 200원에 팔아 140원을 남기는데 그게 아까웠던 것이다.
20대 후반 부산에서 신발공장을 인수하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그는 첫 사업에 성공하면서 바로 자신의 고향부터 찾았다. 작년에도 어김없이 1억2천700만원을 합천 경로잔치 행사 후원금으로 내놓았다. 인성장학회를 통해 3천500만원을 교육발전기금으로도 내놓았다. 1981년도 28세에 모교인 적중초등학교를 시작으로 36년을 쉬지 않고 고향에 기부를 해온 셈이다.
-고향으로 내려와 처음 기부한 날이 기억나는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당시 도시 아이들에게 최고 인기였던 야광만화 캐릭터가 새겨진 신발을 비롯해 우유, 빵, 연필, TV, 비디오 등을 기증한 게 시작이었다. 36년 전의 일이다.
내 어린 시절은 동네에서 돼지가 병들어 죽으면 그놈을 잡아 가마솥에 물을 한가득 부어 끓였다. 기름이 둥둥 뜨고 고기는 몇 점 안 되는데 그것을 귀하게 여겨 며칠 동안 먹었다. 가난해도 너무나 가난했다. 아이들에게 잘 해주고 싶었다. 돈을 벌자마자 모교인 적중초등학교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다.
-36년 동안 100억원에 가까운 거액을 꾸준히 기부해왔다. 고향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라도 있는가?
▶내 고향 합천이 가난했기 때문이었고, 그 가난 속에서 내가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난함에도 항상 남에게 베푸는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친구와 엿가락을 부러뜨려 나눠 먹을 때도 더 긴 부분을 친구에게 줬다고 칭찬하시던 어머니였다. 동네 거지나 문둥이들이 집에 와도 결코 그냥 돌려보내는 일이 없으시던 어머니. 할머니가 주지 말라고 말려도 한사코 보리쌀을 퍼서 몰래 갖다 주시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내 평생의 한이 어머니다. 18년 동안 시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며 뒷바라지를 하신 어머니가 갑자기 간암에 걸리셨다. 나는 고향 어르신들 즐겁게 해드린다고 잔치를 벌이면서도 정작 우리 어머니는 병원 한 번 모시지 못하고 드러눕게 한 것이다. 돈을 벌면 뭣 하는가? 이웃에게 베풀면 뭣 하는가? 우리 어머니 호강 한 번 제대로 시켜준 적 없는 불효막심한 아들일 뿐이다.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 고향 어르신들은 내 어머니에 대한 피맺힌 한의 그리움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죽었다.
-올해부터 경로잔치 행사 후원을 그만둔다는 선언은 어떻게 된 일인가?
▶김천에 있던 베어링공장을 11년 전 고향으로 옮겼다. 그런데 공장에서 돈을 벌어 기부를 하는 게 아니라 군과 결탁해 모래사업을 해서 기부한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갈 수 있는 자신감을 잃었다. 여기서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가슴이 미어지고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다. 그러나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면 단위로 군에서 경로잔치를 여는 곳은 전국에서 합천이 유일하다. 하창환 군수가 처음 당선되면서 제안했던 것이다. 합천군 17개 읍'면 전체에서 경로잔치를 열자는 하 군수의 아이디어에 두말 않고 동참했다. 고향 어르신을 진심으로 섬기고자 하는 하 군수의 통 큰 경로잔치 기획에 오히려 내가 더 고마웠다. 해마다 1억원 이상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시작했던 경로잔치라 오래오래 하고 싶었다.
경로잔치뿐 아니라 각 마을회관에 TV와 에어컨, 학생들 장학금, 각 사회단체 행사 후원금 등 최소 3억원 이상을 해마다 고향에 기부해 왔다. 그러나 고향에 설립한 공장에서 번 돈으로 기부하는 게 전부인 사람에게 군의 모래 장사로 생색을 낸다고 하니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율곡면의 어느 어르신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동안 합천의 모래를 팔아 천억원을 벌었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망연자실했다. 그 어르신을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좁은 시골 바닥에서 악의적인 소문이 한 번 돌면 사실 여부를 떠나 치명적이다. 무슨 말을 해도 궁색한 변명에 불과하게 되고, 무슨 말을 해도 사실과 멀어지게 된다. 소문이 진실로 둔갑하기 쉬운 곳이 바로 시골이다. 1억이 10억원이 되고, 10억이 100억원이 되고, 100억이 천억원이 된다.
고향에 공장을 짓고 기부하는 사람이 이런 매도를 당한다면 어느 누가 고향 사람 무서워서 고향에 투자를 하겠는가. 고향에 기부하려는 사람한테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말이다.
-삶의 큰 기쁨이었던 경로잔치 행사 후원을 중단해도 후회는 없겠는가?
▶고향에 온 지 11년이 됐지만 그동안 땅 한 평 산 적이 없다. 오해를 살까 봐 조심스럽게 살았는데 지금은 고향에 돌아온 게 후회스러울 정도다.
나는 지금까지 아무 조건 없이 36년간 고향을 위해 기부해 왔다. 28세 때 첫 사업에 성공하면서 바로 찾은 게 나의 모교 적중초였다. 정치에 뜻을 두고 기부행위를 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도 많았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정치 일선에 나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고향이 좋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고향 어르신을 내 부모처럼 섬기고 싶었을 따름이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욕심 없이 고향을 위해 기부해왔는데, 지금은 상처뿐인 영광만 남았다. 만일 사토 외에 내가 합천으로부터 다른 이익을 취한 게 있다면 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오히려 군에 섭섭함과 원망이 많다. 군에서 사업적인 도움을 조금이나마 받고서 지금과 같은 매도당한다면 덜 억울하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고향 어르신들을 위한 경로잔치 행사 후원을 중단하는 것은 내 살점을 도려내는 일이다. 그러나 군의 이권사업에 개입해 남은 이득으로 후원한다는 오해를 사면서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후회할 짓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고향 어르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초창기 경로잔치를 할 때 적중면 16개 마을을 아침부터 하루 종일 돌던 기억이 난다. 어르신들이 주는 참기름, 찹쌀 등을 차에 싣고 부산으로 오밤중에 돌아와 이부자리를 깔고 누우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미친놈처럼 웃음이 절로 났다.
해마다 여는 경로잔치가 어찌 보면 나의 1년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었는지도 모른다. 고향의 어르신들이 경로잔치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경로잔치를 기다렸다고 볼 수 있다. '베푸는 것만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행위는 없다'는 나의 신조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베푸는 것만큼 진실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다. 36년간 고향의 어르신들이 내게 그것을 증명해줬다. 악의적인 소문을 무시하고 끝까지 가야 한다고 수없이 되뇌기도 했지만, 결국 좌절할 수밖에 없는 나의 나약함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동안 고향의 어르신들 덕분에 행복했었다고 고개 숙여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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