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실 높은 곳 명상에 잠긴 미륵보살

입력 2018-01-22 00:05:00

봉산문화회관 기억공작소

기쿠치 다카시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모습.
기쿠치 다카시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모습.

봉산문화회관이 기획한 기억공작소의 올해 첫 번째 초대작가는 일본 작가 기쿠치 다카시(사진)다.

'애매한 기억'이란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에서 기쿠치 작가는 미륵보살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태어나기까지의 56억7천만 년이라는 시간과 거리를 사유하고 시각화한다. 관람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전시실 높은 곳에 설치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머물다가 잠시 먼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면 범종 소리와 함께 미륵을 뜻하는 범자가 먼저 보인다. 자세히 보니 32개의 점이 범자 형상 위에 부조처럼 솟아 있다. 이 서예 작품은 전시실 내부 4벽면을 둘러싸고 있는 23m 길이의 천에 576만 개의 점을 프린트한 작업 '576 million dots'를 이루는 기본 단위로서의 글자이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서면 범종소리가 울리는 자리에 실제 범종의 일부를 본떠 제작한 '소리의 오마주'가 우뚝 서 있다. 2.5m 높이에 폭이 좁은 이 작품은 일본 나라시의 '동대사' 절에 있는 범종과 그 소리를 채집해 이를 다시 시청각적으로 그려내는 기억이다. 위를 올려다보면, 1m 폭의 천을 종이접기하듯 정교하게 접어서 벽면에 두 단 혹은 세 단으로 설치한 '576 million dots' 작품과 이를 배경으로 벽면의 좌측 상단 높은 곳에 작은 황금색 미륵보살반가사유상 'perfume'이 설치돼 있다. 벽면 위의 천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글자 형상이 보일 정도로 작은 글자가 프린트돼 있고, 그 글자는 32개의 점으로 구성돼 있다. 이 설계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들여다보면 시간과 거리의 규모가 재생되는 듯 현기증이 느껴지는 공간 연출이며, 대기를 사이에 두고 영원한 평화와 기쁨과 이상이 가득해지는 공간 차원의 '애매한 기억'이다.

다른 반대편 공간의 좌측 벽면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기억하고 그리는 'Meeting', 바람이 닿는 촉감의 기억을 상징하는 '질풍', 둥근 얼굴의 여인을 기억하는 '여성' 등 나무작품의 기억을 떠올리는 조각들이 보인다. 그리고 가운데 벽에는 금색 '유비무환의 지팡이' 2점을 사이에 두고 얼굴 사진 2점 '많이 먹어'와 '더 먹어'가 걸려 있다. 이는 미술가 홍현기의 어머니가 작가에게 베풀었던 애정에 대한 기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우측 벽면에는 나무로 만든 미륵보살의 손 10개를 겹쳐서 불확실한 기억의 사유를 표현한 '기억의 잔상'이 보인다. 그 옆으로 생명체의 근원을 기억하는 염색체를 털실과 나무로 표현한 'XY' 작품이 보인다. 또 전시장 밖, 지하와 1층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 공간에는 2011년 3월 11일, 32m 지진 해일로 인한 재해와 대자연의 힘을 기억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염원했던 애드벌룬 작품 'Requiem'을 이곳 장소에 맞게 재현한 작품이 있다.

봉산문화회관 정종구 큐레이터는 "기쿠치 작가는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상실되거나 제거되었던 서사적 기억을 주목하고 자신과 우리의 애매한 기억 층 속에 이를 다시 각인시키고 있다"면서 "이는 아마도 자연 혹은 생명, 평화, 기쁨, 치유와 그 관계에 관한 창조적 기억일 것"이라고 말했다. 기쿠치 다카시전은 4월 1일(일)까지 봉산문화회관 2층 4전시실에서 진행된다. 053)66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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