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주검으로 돌아온 은정이를 아시나요?

입력 2018-01-17 00:05:33

달성 납치·살해 해결 감감…사건 현장은 아파트촌으로 변해, 범인 흔적·CCTV 없어 수사 난항

2008년 5월 30일 자신의 집에서 납치됐던 여초교생이 사건 발생 2주 만인 6월 12일 인근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되자 경찰들이 현장 주변을 조사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2008년 5월 30일 자신의 집에서 납치됐던 여초교생이 사건 발생 2주 만인 6월 12일 인근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되자 경찰들이 현장 주변을 조사하고 있다. 매일신문 DB

지난 2008년 5월 30일 오전 4시. 대구 달성군 유가면 봉리의 오래된 한옥집에 괴한이 침입했다. 허모(72'사망) 씨와 손녀 2명이 세들어 살던 집이었다. 허 씨를 마구 때린 괴한은 방 안에 있던 은정 양을 납치해 종적을 감췄다. 당시 은정 양의 나이는 불과 열세 살이었다. 경찰은 연인원 2천여 명을 동원해 은정 양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3일 뒤인 6월 12일 오후 5시, 은정 양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은정 양이 발견된 곳은 용박골로 불리던 마을 인근 한 야산. 집에서 불과 2㎞ 떨어진 곳이었다.

올해는 은정 양 납치'살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는 해다.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는 아파트가 들어섰고, 수사팀은 뿔뿔이 흩어졌다. 가족들은 지난해 스무 살이 된 은정 양의 동생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남지 않은 흔적, 미궁에 빠진 수사

10년의 세월은 모든 풍경을 바꿔놨다. 지난 12일 오후 찾아간 대구 달성군 유가면 일대. 곳곳에는 유가면의 읍 승격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조용한 농촌 마을이던 유가면은 대구 테크노폴리스 조성과 함께 인구 2만 명을 넘었다. 공원 부지인 용박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은정 양이 살던 동네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수사는 초기부터 난항을 겪었다.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발견된 은정 양의 시신은 부패가 심해 사인조차 추정하기 어려웠다. 범인의 족적이나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다. CCTV도 없었다. 목격자들은 "카고 바지(건빵바지)를 입은 남성이 집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봤다"는 진술만 하고 입을 닫았다.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할아버지의 죽음은 치명타가 됐다. 할아버지는 범인을 두고 '모르는 남자' '알고 지내던 50대 이씨' '싸운 적 있는 30대 2명' '40대 전후 남자 2명' 등으로 진술을 번복했다. 손녀를 잃은 충격에 식음을 전폐한 할아버지는 수개월 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대구경찰청 장기미제수사팀은 괴한 2명이 할아버지를 폭행하다가 우발적으로 허 양을 납치,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증거는 거의 없다. 당시 수사본부에 몸담았던 한 경찰관은 "용의 선상에 오른 사람만 수십여 명이었지만 모두 알리바이가 있거나 사건과 무관했다"면서 "결국 주변 사람들의 진술이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당시 하지 못했던 말을 수사진에게 해준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동생의 최면 진술에 희망 걸어

수소문 끝에 은정 양의 아버지 허모(47) 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10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건 발생 당일 오전 5시쯤 연락을 받은 허 씨는 강원도에서 대구까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고 했다. 온갖 소문도 가족들을 괴롭혔다. 주변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고 죽였다고 수군댔다. "제 인생을 돌아봤습니다. 그동안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았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나…." 허 씨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사건 당시 흩어져 있던 가족들은 여전히 따로 산다. 은정 양의 어머니는 둘째 아이와 함께 부산으로 떠났고, 허 씨는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잇고 있다. "(범인이) 죽을 때 죽더라도 자백을 해주면 좋겠어요.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죽을 때까지, 평생 반성하고 살겠습니다." 허 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허 씨는 은정 양의 동생에게 작은 희망을 걸고 있다. 당시 열한 살이던 동생은 작은 방에 숨어 화를 면했다. 동생은 경찰 조사에서 '느그 아빠 어디 있노'라는 말을 들었다는 정도만 진술했다. 동생은 성장하면서도 언니에 대한 얘기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가족들은 그런 동생을 묵묵히 기다렸다.

지난해 은정 양의 동생은 성인이 됐다. 허 씨는 그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건넬 생각이다. 허 씨는 "아이가 고교생일 때 방송사에서 최면술사를 불러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자고 제안했지만 정중히 거절했다"면서 "이젠 아이가 성인이 됐으니 부탁을 해볼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작은 단서라도 나오길 바라고 있다"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