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윤의 에세이 산책] 겨울나무

입력 2018-01-16 00:05:00

박시윤 수필가
박시윤 수필가

칼바람 들어찬 대지 위로 시린 침묵이 자리를 튼다. 터를 나누어 뜨겁게 포옹하던 것들은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났다. 황량하게 비워진 들판, 쩡쩡쩡-저 끝단에서부터 대지는 말없이 얼고 터졌다.

나를 기억하던 잎들은 얼마나 아득한 세월 뒤로 흩어졌을까. 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미련을 이제 잊어야 하나 보다. 나는 오늘도 언 땅에 버티고 서서 지독한 몸살을 앓는다. 순조롭게 뻗어가던 생장점 끝이 몹시도 시리다. 봄나물의 새순처럼 보드랍던 끝단조차 곁가지로 남아야 하는 계절은, 독한 진통제로도 막아낼 수 없는 잔인한 통증이었다.

인연은 그런 것이었다. 뿌리 끝부터 수액이 흐르던 봄날, 몸뚱어리마다 연둣빛 여린 잎 틔우고 도란도란 꽃잎 같은 속마음을 주었다. 그것은 내게 찾아온 행복이었고 삶이었다. 뙤약볕 강렬하던 한낮에 우리는 거대한 그늘을 만들어 낮잠을 청하곤 하였다. 이따금 새들이 찾아와 낮잠 속에서 맑게 우짖곤 하였다. 내가 꿈을 꿀 때마다 잎들은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며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되었다. 살가운 체온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나는 산이 되고 싶었다. 나 혼자 산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곁가지들이 거추장스러웠다. 지독한 가뭄이 들던 계절, 나는 툭툭 인연을 털어냈다. 영원히 무성한 푸르름을 자랑하며 천지를 버티고 서서, 오직 혼자 이 대지의 주인으로 남고 싶었다. 그것이 내 젊음의 자존심이었으니까.

눈이 내린다. 투박하게 들어박힌 옹이들 위로 눈이 내린다. 한뎃잠에 언 몸을 녹여주려는 듯 눈은 나를 덮고 또 덮는다. 포근하다. 나른한 잠이 쏟아진다. 아득히 멀고도 먼 발아의 기억이 스친다. 척박하고 단단한 대지에 미미하게 뿌리내린 생장점 끝에 시원한 물이 감지되던 순간이 스친다. 비바람 몰아치는 중에도 힘껏 버티어낸 격동의 시간들이 움찔하다. 버티어낸 세월을 지날 때마다 동그랗게 그려지던 나이테가 뿌듯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마흔 개를 훌쩍 넘긴 나이테들.

곁가지 끝에 매달린 마른 잎새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인다. 맞이하고 놓아주는 것도 때가 있던가. 마지막까지도 내 손을 놓지 않고 박제된 잎새에 지금 나는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다. 처연하게 매달린 잎새 위로 눈은 자꾸만 무게를 지운다.

'신이시여, 제게 저당 잡힌 그의 영혼과 육신을 고이 내려 주소서. 수많은 날 동안 그의 기도는 제가 사는 것이었습니다. 부디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저 남은 잎새를 고이 내려 주소서.'

들녘에 겨울나무 한 그루 섰다. 얼고 터지는 고통을 버티어 내야만 더 푸르고 싱싱한 제 빛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저 들판의 나무는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삶은 이기는 것도, 가지는 것도 아니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스스로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은 추한 것이 아니라 지혜라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는다. 나무, 한 생애의 삶이 얼마나 정직한가. 한 그루의 겨울나무 아래서 처연하게 일그러지고 있는 내 안의 자존심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

박시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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