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사람들] <4>도매시장 상인과 국밥집 할머니

입력 2018-01-12 00:05:00

"손님 맞이하려면 바지런히 일해야죠"…청과물 파는 정재흥 씨·국밥집 운영 김숙영 씨

대구시 중구 서문시장에서 40년째 국밥집을 하는 김숙영 씨가 털모자를 쓴 채 아침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대구시 중구 서문시장에서 40년째 국밥집을 하는 김숙영 씨가 털모자를 쓴 채 아침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10일 오전 5시 50분 대구 북구 매천동 대구농수산물도매시장 중앙청과 경매장. 상인 100여 명의 시선은 경매장 한가운데 설치된 전광판을 향하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이날 경매에 오른 과일의 품목과 출하처, 등급, 수량 등이 빼곡히 떠 있었다. 도매상들은 조금이라도 싸고 품질 좋은 과일을 고르려고 잠시도 전광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곳에서 최강청과를 운영하는 정재흥(52) 씨도 다른 상인들과 함께 날카로운 시선으로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중도매사업으로 15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청과 중도매상이다. 꼼꼼하게 과일을 살피던 정 씨는 "눈이 내려서 인지 오늘은 경매 물건이 좀 적다. 이런 날에는 경매가가 확 뛸 수 있어서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경매 시작을 알리는 경매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중도매인들의 손이 바빠졌다. 중도매인들은 각자 손에 든 전자입찰기로 희망 입찰가를 넣었다. 정 씨는 이날 귤과 한라봉, 천혜향, 수박, 딸기, 단감 등을 낙찰받았다.

이른 새벽부터 눈을 뜨는 정 씨는 늘 피로를 달고 산다. 매일 오전 5시 20분이면 경매장에 도착해 거래처 주문과 매물을 꼼꼼히 살피고 경매에 참여한다. 평일에는 잠자는 시간이 5시간 정도이고, 아침 식사는 거르는 날이 더 많다. 계속되는 불황은 정 씨가 더 바지런하게 일하도록 채찍질한다. 경기가 침체되면 과일 같은 기호식품 소비부터 줄이는 경향이 있어서다. 정 씨는 "어서 경기가 회복돼 서민들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과일 소비도 늘었으면 좋겠다"고 웃었다.

이날 오전 4시 30분 중구 서문시장. 어두컴컴한 동산상가 골목 안에 홀로 불을 밝힌 노점 한 곳이 눈에 띄었다. 기다란 판매대와 좁은 싱크대. 가득 쌓인 식재료와 조리도구들. 큰딸의 이름을 딴 '기선이네 국밥집' 주인 김숙영(74) 씨는 네 걸음 이상 뗄 수 없는 이곳에서 40년을 보냈다. 차디찬 겨울 냉기를 막는 건 가게를 둘러싼 비닐 바람막이뿐. 김 씨는 털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채 파를 썰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 씨의 별명은 '체면 없이 마구 덤비는 사람'이라는 뜻의 '허발이'다. 아담한 몸집에 푸근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가 이런 거친 별명을 얻은 건 툭툭 내뱉듯 무심한 말투와 이따금 던지는 구수한 욕설 덕분이다. "험한 시장바닥에서 자식들을 먹여 살리려 독하게 버티다가 스스로 거칠어지신 거예요." 둘째 딸 정기옥(47) 씨가 설명했다.

"한평생을 새벽에 일한 여잔데 뭐 새삼스럽게…." 김 씨가 손사래를 치며 숭늉 한 대접을 건넸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구수한 숭늉에 뱃속까지 뜨끈해졌다. 김 씨의 국밥집에는 오래된 단골이 많다. 수선가게를 하는 최영백(60) 씨가 자리에 앉았다. "난 11년 동안 여덟 번 빼고 매일 왔어요. 어디 호텔이나 고급식당에 가도 여기 시래기 국밥만큼 맛있는 게 없어요. 아침에 시래기 국밥 안 먹으면 나사가 빠진 것처럼 하루 종일 흐물댄다구요."

소리 없이 나누는 삶도 실천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팥죽 200그릇을 끓여 노숙인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그의 가게에는 17년 동안 공짜 식사를 하는 손님도 있다. 노숙인이 와도, 돈이 없다고 해도 손님을 내치는 법이 없다. 큰딸 정기선(49) 씨는 "어머니를 존경하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어요. 공짜 밥을 먹는 그분은 우리를 이쁜이, 꽃분이라 불러요." 듣고 있던 김 씨가 "사정이 딱해서 국밥 한 그릇 주는 걸 갖고 뭘…" 하고 얼버무렸다. 김 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 요즘에는 유시민 작가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세 번이나 읽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토지, 혼불, 태백산맥, 아리랑까지 다 읽었어요. 나중에 '서문시장 40년 힘들게 살아온 길' 이런 책도 내고 싶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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