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 매진, 단원 화합…잘나가는 대구시향 뒤엔 그가 있다
대구시립교향악단이 창단 이래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2015~2016년 전석 매진, 지난해 객석점유율 99.2%(정기연주 기준)라는 성적은 타 시·도립 교향악단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기록이다. 대구시향 공연이 인기를 끄는 데는 리모델링 후 새로 태어난 전용 연주홀과 지역 클래식 음악의 저변 확대에서 답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대구시향의 연주력 향상과 단원 간 화합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줄리안 코바체프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 선임(2014년)과 외국인 수석 제도 도입(2009년) 등은 순풍에 돛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적잖다. 그동안 대구시향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원천
2014년 3월 30일 낮 12시 인천공항. 한 중년 남자가 은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또 다른 남자가 두리번거리던 그에게 다가갔다. 소개를 마친 두 남자는 바로 버스 탑승장으로 갔다. 일요일 오후 대구행 리무진 버스는 거의 만석이었다. 버스 맨 뒤 남은 두 자리를 겨우 차지한 그들은 줄리안 코바체프 대구시향 상임지휘자와 그의 '절친' 오상국 사무장이었다. 겨우 숨을 돌린 코바체프가 입을 뗐다. "어느 도시, 어느 공연장에서도 고급 전용차로 마중 나왔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라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사비를 써서 공항까지 가서 그를 마중했던 오 사무장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첫 만남은 버스 뒷좌석처럼 덜컹거렸다. 하지만 오 사무장의 한마디에 코바체프는 오해를 풀었다.
"대구시향의 음악에만 신경 써 달라. 당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24시간 동안 당신을 보살피겠다."
초청연주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온 적이 없었던 코바체프에게 대구는 생소한 곳이었다. 그가 교향악단 업무를 익히고 자리를 잡는 것만큼이나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대구 생활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잦은 해외 공연으로 떠돌이 생활이 익숙했던 그는 이후 내내 호텔에 기거했다. 장기간 묵을 방으로 옮기자고 설득하는 데만 7개월이 걸렸다. 그해 11월이 되어서야 오피스텔에 살림을 차렸다. 오 사무장의 일은 그에게 취업비자를 발급하고, 연주 프로그램을 짜도록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테니스를 좋아하는 코바체프를 위해 3개월간 실내연습장에서 강습을 받았고, 그가 즐기는 돈가스를 매주 서너 번씩 함께 먹었다. 주말도 반납했다.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경기장 할 것 없이 대구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를 데려갔다. 벌써 5년째다.
◆국적은 다르지만 울림은 하나
대구시향은 2009년부터 국내 연주자의 연주력이 취약한 금관 악기(트롬본'트럼펫'호른) 파트에 외국인 수석 제도를 도입했다. 새 단원 영입도 오 사무장의 손을 거친다. 콩쿠르가 열리는 곳은 어디든 찾아간다.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연주자를 물색하거나 외국 연주자 구인구직 사이트(Musical Chairs)에서 자유계약(FA) 시장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기존 연주자가 재계약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핫'한 협연자를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합한 연주자를 발견하면 만나서 의견을 묻거나 메일을 보낸다.
계약이 성사되면 오 사무장은 연주자의 사증발급을 신청한다. 출입국 사무소가 허가하면 외국 주재 한국대사관이 비자를 발급한다. 현재 트롬본 수석인 파우스티노 디아즈의 경우 아내를 위한 가족동반비자까지 받아야 했다.
이들의 적응 여부는 대구시향의 연주력과 직결된다. 그는 "새 단원이 올 때마다 기존 단원과 호흡을 맞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돕는다"고 했다.
외국인 단원이 오기 전 거처를 미리 알아보고 사비로 계약금을 낸다. 입단 계약을 한 단원이 계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면서 계약금과 중개수수료를 떼인 적도 있다. 외국인 연주자들은 부동산 계약서 앞에서 "I don't have enough money"를 외치기 일쑤다. 이들에게 보증금(deposit)은 1, 2개월치 월세이기 때문이다. 디아즈도 월세 보증금 300만원이 없다고 했다. 바로 은행 ATM기에서 200만원을 인출해 보탰다.
다음 일은 이들을 대신해 도시가스'인터넷'전기 등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신청하는 것이다. 외국인등록증을 발급받아 휴대폰을 개통하고 건강보험에 가입하고, 통장 개설 등 은행 업무를 돕는 것도 오 사무장의 일이다. 도시철도를 타거나 세탁기나 보일러를 조작하는 방법, 살림살이를 살 수 있는 곳도 일일이 알려줘야 한다.
어느 토요일 오후 9시 디아즈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광고 전단 사진을 보내며 "치킨을 주문해달라"고 했다. 디아즈에게는 금액을, 치킨집에는 그의 집 주소를 알려주고 치킨 배달 주문을 대신 해줬다. 지난달 트럼펫 수석으로 위촉된 안돈 마르코브가 다닐 만한 한국어학원도 찾아냈다.
짧게는 1년 추억을 품고 떠날 이들에게 오 사무장은 정성을 다한다. 그는 "능력이 출중한 연주자라도 타향에서 도움 없이 살다 보면 실력을 발휘할 수 없지 않을까요?"라며 "대구를 거쳐 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일'처럼 그가 나섰던 건 유학 때 겪었던 설움 때문이었다.
그도 한때는 트롬본 주자였다. 대학 졸업 후 창원시향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으로 떠났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5년을 보낸 터라 타국살이의 고충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브루클린 음악원과 뉴욕주립대 대학원을 졸업한, 당시만 해도 드문 금관 주자였던 그는 한국에 돌아와서 대학 강의 등으로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그런데 가끔 찾아오던 중이염 증상이 심해졌다. 트롬본을 손에서 놓아야 할 만큼.
그렇게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대구시향 홍보 마케팅을 맡게 됐다. 홍보가 천직이었는지, 1년 만에 사무장으로 승진했다. 지휘자나 단원과의 소통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연주자에 대한 정보나 다른 악단의 상황도 꿰고 있어야 한다. 인맥도, 전문성도 모두 음악 전공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큰 무대를 향해
2015년 6월 23일 코바체프가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리허설 도중 또 쓰러졌다. 한 달 전 대구 공연 앙코르 무대에서 심정지로 쓰러져 응급조치를 받았던 그였다. 그가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동안 오 사무장은 휴가를 내 베로나로 갔다. 가슴에 페이스메이커(심장에 부착하는 인공심박조율기)를 붙인 코바체프는 '미스터 오'를 웃으며 맞이했다.
건강을 회복한 코바체프를 확인한 오 사무장이 바로 향한 곳은 대구의 자매결연도시 밀라노 시청이었다. 이미 대구시에 밀라노 시청 국제교류과와 문화예술과 담당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이야기해 둔 상태였다.
"내년에 대구시향이 이곳에서 공연하게 도와주겠습니까?"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더 큰 길이 펼쳐졌다. 이형근 대구콘서트하우스 관장을 비롯한 모두의 노력으로 밀라노 공연은 유럽투어로 바뀌었고 대구시는 4억5천만원을 집행했다.
2016년 9월 25일부터 9박 10일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홀-체코 프라하 스메타나홀-오스트리아 빈 뮤직 페어라인 골든홀 등 음악의 본고장을 순회하는 일정이었다. 단원들은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무대에 올랐다. 세계무대를 향한 꿈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거의 모든 객석이 찼다. 프라하에서는 티켓이 다 팔렸다. 한마음이 되어 움직였던 지휘자와 단원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고공행진 중인 '코바체프호'의 인기가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아직도 딤프나 오페라축제가 겹칠 땐 다른 공연장 입구에서 카탈로그를 나눠준다. 오 사무장은 "남의 가게 앞에서 장사하는 꼴이죠. 클래식 음악에 열풍이 불었다지만 수요는 정해져 있어요. 큰 공연이 겹칠 땐 티켓 판매가 걱정돼요"라고 했다.
코바체프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해왔다. 대구시향이 고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면 대구 작곡가의 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것. 올해 공개된 프로그램에는 지역 출신 이철우'진영민 작곡가의 곡이 포함됐다.
오 사무장은 또 꿈을 꾼다. 대구시향의 다음 무대가 미국 카네기홀, 링컨센터가 되는 것이다. 연주자라면 한 번쯤 꿈꾸는 무대에 오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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