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 3만달러 시대의 상식

입력 2018-01-09 00:05:00 수정 2018-10-10 16:26:12

일본항공(JAL)의 승무원 잡지에 이런 유머가 실렸다. '아마존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일본과 프랑스, 러시아인 각각 2명씩 승객 6명만 살아남았다. 며칠 밀림을 헤매다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우스갯소리에 정답이 있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정답 풀이를 보면 그럴 듯하다.

러시아인은 '룰렛 담판'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 사람은 미인을 애인으로, 또 한 명은 연인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도쿄 본사에 연락해 처리 방법을 묻는다는 게 잡지가 내놓은 답이다. 만약 이 유머에 한국인을 끼워넣는다면? 미인은 제쳐두고 먼저 비행기 추락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물론 유머다.

그런데 한낱 유머에도 국민 특성을 개입시키는 것은 그런 이미지나 시각이 일정 부분 보편에 근접했거나 아니면 편견이 굳어져 집단 특성으로 잘못 매겨진 경우다. 관찰자에 따라 전혀 다른 관점과 인식이 드러나는 경우를 보면 '보편화의 오류'도 충분히 가능하다. 예를 들면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한국과 같은 F조에 속한 축구 독일대표팀 수석 전력분석관이 본 한국 인식이다. 그는 독일과 다툴 한국, 스웨덴, 멕시코 대표팀 전력에 국민 특성을 반영해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그저께 일간지 '함부르거 아벤트블라트'에 소개된 인터뷰에 따르면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와 국민, 정신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한국과 스웨덴, 멕시코를 여행해 보면 차이점이 분명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그는 "한국인은 아주 열심히 일한다. 규율도 아주 잘 지킨다. 또 맡은 임무에 대해서는 집요하게 거의 다 완수한다"고 평가했다. 얼토당토않은 분석은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인식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몇 해 전부터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크게 부각된 '헬조선'이라는 용어에서 우리의 상황 인식이 어떤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가진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크게 두드러지거나 열패(劣敗) 의식이 점차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심각하다. 무엇보다 헬조선의 단초를 제공한 '정부와 국회, 사법기관 등 공적 시스템에 대한 불신'은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 이는 정치인과 공직자, 재벌의 부정부패와 특권의식이 사회 공동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더 많은 돈을 가질수록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다듬고 키워나가야 할 가치나 공동체 의식을 망각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다. 이런 그릇된 의식의 돌부리가 사회 발전과 공동체의 진보를 가로막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연말, 충북 제천의 화재 참사는 '헬조선'이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님을 증명했다. 사고 직후 화재 원인과 문제점을 지적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결론은 우리 사회의 무사안일이었다. 상식이 벽에 막히고 법이 무력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수십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다. 몇 년 전 세월호의 교훈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회라면 '헬조선' 푸념도 이제는 과분하다. 또다시 관련 법을 뜯어고치고 뒷북을 쳐도 집단의 속성이 바뀌지 않는데 무슨 소용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합리적인 사고와 교양에 기초한 상식의 위력은 타율성에 뿌리를 둔 법의 효율을 크게 능가한다. 법보다 상식이 앞서는 사회가 더 건강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올해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호언했다. 선진국의 문턱에 다다른 것은 분명 희소식이다. 하지만 주머니가 조금 더 두둑해진다고 선진시민, 선진사회가 될 수는 없다. 상식을 거부하고 기본을 무시하는 사회는 아무리 '선진'을 외쳐도 후진성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요즘 국정을 농단한 세력만이 적폐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우리 모두가 적폐의 근원이자 청산 대상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창문을 굳게 막고 털어낸 먼지와 적폐 청산이 다를 게 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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