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오페라 도시로…음악이 모두의 친구 됐으면"
지난해 대구오페라축제에는 4편의 메인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총 9회 공연에 관객은 1만2천695명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페라는 여전히 생소하고, 어려운 음악 장르 중 하나다. 하물며 40여 년 전이라면. 유네스코 음악 도시 대구를 이야기하며 오페라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근대음악의 태동지로 손꼽힌 대구지만 정통 오페라가 자리 잡게 된 데는 민간오페라단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대구시립오페라단이 창단(1992년)되기도,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개관(2003년)하기도 전에 무대를 달군 건 영남오페라단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김귀자 영남오페라단장이 있었다.
전석 매진.' 현장 발매 창구 앞에 안내판이 내걸렸다. 1995년 5월 26일 저녁,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박쥐' 공연의 둘째 날 대구문화예술회관 매표소 앞이었다. 초대장으로 객석을 메웠던 첫날 공연을 곱씹을 여유도 없이 무대 뒤에서 둘째 날 공연을 준비할 때였다. 하루 만에 소문이 퍼진 덕분에 이날 공연의 표가 동났던 것이다. 1995년 5월, 오페레타 '박쥐'는 그렇게 한국에 왔다. 서울 세종문화회관도 예술의전당도 아닌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유럽 오페라극장의 연말연시 단골 레퍼토리인 '박쥐'가 초연됐던 것이다.
◆용감한 도전, 초연을 이끌다
6'25전쟁 이후 대구 클래식 음악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정통 오페라의 싹을 틔우기에 조건은 열악했다. 1960, 70년대에 이르러서야 지역 대학에 음악학과가 개설됐고, 문화예술은 생활고에 밀렸다. 열정만으로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모든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지역에 활동기반이 약한 김금환 영남오페라단 초대 단장을 돕고자 언론사를 찾은 건 전속가수 김귀자였다. 그는 신문'방송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며 공연을 주최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그의 열정이 눈에 띄었는지, 오페라단은 그를 제2대 단장으로 선임했다.
눈 깜짝할 새 단장이 됐다. 지역민에게 새로운 작품을 제대로 보이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그때 TBC대구방송이 개국 축하 공연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1995년이었다. TBC는 1억7천만원을 집행했다. 이전 작품 제작비의 5, 6배에 달하는, 괜찮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큰 금액이었다.
단장직을 이어받을 때 김귀자 단장이 가장 먼저 떠올렸던 작품은 오스트리아 유학 당시 매년 보았지만,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쥐'였다. 빈(오스트리아)의 양대 오페라극장인 빈 슈타츠오퍼와 빈 폭스오퍼는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 저녁에 '박쥐'를 공연한다.
바로 비행기를 탔다. 도착한 곳은 빈의 국민 오페라극장인 폭스오퍼. 오페레타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다. '박쥐'의 감동은 여전했다. 이튿날인 1995년 1월 2일 빈 현지 전화번호부를 뒤진 끝에 '박쥐'의 예술 총감독인 로버트 헤르츨(Robert Herzl)을 찾아냈다. 김 단장은 자신을 한국, 대구에서 온 오페라단장이라고 소개하고 '박쥐' 연출을 부탁했다. 5월 말 상연, 개런티 500만원이라는 조건에 헤르츨은 흔쾌히 응했다. 며칠 뒤 그의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런 조건으로 공연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감독 헤르츨은 "마침 쉬는 때이고, 한국에서 작품을 올리고 싶다"면서 "신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일은 착착 진행됐다. 분장은 당대 최고라 일컬어지던 전예출 분장팀이 맡았다. 독일어로 된 대본은 변학수 경북대 교수 등과 함께 번역'번안했다. 이른바 '박쥐'의 한국어 대본이 만들어진 것이 이때다.
복병은 다른 데 있었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작품을 올리겠다는 김 단장의 말에 오페라단 내부에서조차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생소한 작품에 자신이 없었던 TBC도 설득해야 했다. 김 단장은 실력파 성악가들로 우려를 불식시키기로 했다. 강화자(메조 소프라노)'김관동(바리톤)'박순복(소프라노) 등 전국 무대에서 활약하는 성악가와 정광(테너) 등 지역 중견 성악가로 꽉 채운 무대에 환호와 갈채가 3일간 이어졌다. 대구에서 초연에 성공하자 서울에서도 러브콜이 왔다. 넉 달 뒤인 9월 26일 서울 KBS홀에서 앙코르 무대가 펼쳐졌다. "성공할 만한 작품을 성공하게 하는 건 노력입니다."
◆음악은 내 친구
제일여중 1학년 시절, 담임이자 국어 담당이던 손금기 선생님은 기 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한 제자를 예뻐했다. 집에 데려가 오르간을 가르치고, 피아노 교습소를 소개해줬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무렵이었다. 경북여고에 진학한 뒤에는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하대응 교수를 찾아갔다. 하 교수는 당돌한 여학생의 '코르위붕겐'(Chorubungen)을 듣고 개인지도를 허락했다.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다. 대학에 가서도 해가 넘어갈 때쯤에야 연습실에서 나왔다. 대학별로 1등만 참가할 수 있었던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서 오페라 '아이다'의 아리아를 불렀다. 다음날 신문 지면에는 '맑은 목소리'라는 심사평이 실렸다.
음악교사가 되자마자 결혼을 했다. 일상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첫딸이 7개월 되던 해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늘이 노랬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음악이었다. 겨우 터널에서 벗어난 그는 오페라의 본고장으로 유학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명문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립음악원에서 공부를 마쳤고, 1981년 음악교육과를 신설한 경북대 교수가 됐다. 강단에 섰지만 더 큰 무대에 대한 그의 갈증은 계속됐다.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김금환 전 영남오페라단장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무대에 서보겠느냐고 제안했다.
김 단장은 영남오페라단 전속가수였다. 배역에 상관없이 맡았다 하면 주역이었다. 리릭 소프라노가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은 전부 해냈다. 무엇이든 열심히 했다. 재능만큼이나 놀라웠던 열정은 그를 영남오페라단 새 단장으로 이끌었다. 민간오페라단장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봉임 서울오페라단장은 공연 때마다 빚을 내고 집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며 김 단장을 만류했다.
단장이 됐지만,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매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하면서도 프리마돈나의 꿈을 잃지 않았다. 2000년 '토스카' 상연을 앞두고였다. 오페라단 운영에 대한 스트레스 탓인지 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노래에 집중도 안 됐다. 카탈로그까지 만들었는데 결국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2002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다시 무대에 오르나 했지만, 또 실패했다. 가수로 무대에 서는 일은 그렇게 끝났다.
◆비결은 완성도
프리마돈나 김귀자의 꿈은 영남오페라단에 투영됐다. 한 번을 공연하더라도 제대로 된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다. 탄탄한 캐스팅, 수준 높은 기획을 위해선 제작비가 뒷받침돼야 했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해서 오페라단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기도 하고 궁금해하기도 했다. 매년 삼성이 후원한 수천만원의 제작비는 종잣돈이 됐다. 대구 음악의 위상에 걸맞은 수준 높은 오페라 작품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그에게 적지 않은 후원금이 들어왔다. 모자라는 돈은 자신의 주머니를 털었다. 공연은 늘 성공이었다. 완성도를 높이자 관객이 몰렸다. 시몬 까발라'요셉 발리히'솔라바 래리아'안드레나 카페렐레'마르코 발레리 등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지휘자와 연출가를 섭외했다. 지역 중견 성악가와 전국적 지명도가 있는 성악가를 선발했다. 1996년 '카르멘' 캐스팅 비화가 흥미롭다. 집시여인 카르멘 역에 메조소프라노 김학남이 적격이다 싶었다.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연락했다. 출연료로 500만원을 요구했다. 예산은 빠듯했지만, 그가 필요했다. 흔쾌히 "주겠다"고 했다. 예술은 흥정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한 걸음 더
초연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국립'시립오페라단과 비교해 운영'제작 여건이 녹록지 않은 민간오페라단이 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영남오페라단은 '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1998), '녹두장군'(1999), '집시남작'(2011) 등 4편을 국내 초연하고, '오텔로'(2001), '신데렐라'(2008)를 대구 초연하는 데 성공하며 민간오페라단의 저력을 입증했다. 꾸준히 제작, 상연한 작품은 지역 오페라 무대의 초석을 놓았다. 매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여유도 생겼다. 결식아동돕기, 이웃돕기를 위한 사랑의 음악회를 개최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도 나서고 있다.
2003년 대구오페라하우스 개관은 다른 차원의 자극이었다. '오페라하우스가 생겼는데 민간오페라단이 왜 필요한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 단장은 "예술은 양보할 수 없다. 다른 견해가 있다면 양립하고 보완해야 발전할 수 있다"면서 "공연중심도시를 지향하는 대구이기에 민간오페라단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올해는 한국에 오페라가 들어온 지 70주년이 되는 해다"면서 "대구를 오페라 메카로 만들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음악이 모든 이의 친구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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