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즈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신문사란다. 칼럼을 써달라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는 그런 제안을 받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하자면 복잡할 것 같아 각설하고. 결론은 이렇게 타이프를 치고 있다.
내 입장에서 나름 써야 할 이유가 있었다. 나는 글을 외로울 때 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기분이 좋을 때는 글보다 음악이 좋고, 밥보다 잠이 좋다. 그런데 요즘 내가 처한 현실이 글을 쓰고 싶게 만들었고, 마침 연락도 왔으니 하고픈 말을 주저리 떠들고 싶었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거울의 효과가 '연극'이라 한다면 나에게 거울은 '기억'이다.
연극은 실재를 허구의 힘을 빌어 재창조하는 노동행위이다. 무대를 아무리 사실적으로 만든다 한들 가난한 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관객은 극장으로 찾아 극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내 앞에 선 사람을 보는 것이다.
구조물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한다. 그들의 말과 몸을 통해 관객으로서의 나와 배우로서의 너가 만나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어쩌면 극장에서의 허구는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수단이 될 뿐이지. 그렇지 않은가? 만약에 사람을 보기 위해서 극장을 찾는다면, 연극이 존재하는 이유는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기억하고 싶기 때문에."
무엇을? 사람을. 내가 갖고 있는, 혹은 갖지 못한 무언가를 다시 보고 싶어 찾는 행위. 여기에서 '보고 싶다'는 '기억하고 싶다'와 동음이의어적 성격을 띤다.
극 중 환상의 시간이 아무리 조선시대가 되고 서구가 될지라도 현존하는 객체는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인간이다.
결국 극장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겠다.
필자 또한 자기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다.
나의 의식이 세상과 맞닿을 때 어떻게 바라봐 줄까, 하는 식의 수줍은 두려움. 그렇기에 나의 행위는 지극히 연극적이다.
타인의 눈과 기억을 만나길 원하는 의식적 호기심. 난 이런 생각들이 좋다.
이 시대 마지막 모던보이라 할 수 있는 시인 백석의 시처럼,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연극으로 외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보다 순수한 의지는 어딘가에서 나의 글을 읽고 있을 사랑스러운 당신이 있다면, 얼마든지 글을 쓰고 막을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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