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지방신문협회 공동기획 지방분권개헌 선진국을 가다] <1>프랑스 리옹

입력 2018-01-02 00:05:04

실업자·빈집 넘치던 죽은 도시, 유네스코 창조도시로 거듭나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수직적 위계에 따라 모든 권력이 대통령과 중앙정부에 집중된 구조다. 30년 세월이 흐르면서 중앙집권적 성격의 헌법은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21세기 급변하는 환경 변화와 다양한 시대적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급성장하던 대한민국은 정체 상태로 접어들었고, 지역은 고사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들을 선거로 뽑으면선 형식적 지방분권이 시작됐지만 한계는 뚜렷했다. 환경'경제'복지 분야에서 지역마다 고유한 문제들이 있지만 지방정부는 맞춤식 정책을 펼칠 수 없다. 열악한 재정 상태와 제한된 권한 때문이었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먼저 경험한 선진국들은 강력한 지방분권을 통해 이 문제를 돌파했다. 프랑스'스위스'독일'일본 등은 중앙정부가 큰 틀의 정책 결정 및 통치에만 관심을 갖고 실질적 운영 권한은 지방정부에 이양했고, 지방정부의 권한은 헌법을 통해 보장되고 있다. 그 결과 지방정부는 자치 입법권'재정권'행정권을 갖고 여러 가지 혁신을 이끌어 냈다. 성공적 지방정부의 정책들이 연방정부에 의해 벤치마킹되는 방식의 혁신 사례들이 쏟아졌다.

본지는 '분권 개헌 내 삶 바꾼다' 신년 기획을 통해 선진국들이 분권형 개헌을 통해 창출한 혁신 사례들을 살펴보고, 분권형 개헌으로 바뀌는 지역민의 삶을 생생하게 짚어보려 한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 gook72@busan.com

▶쇠락한 '실크 도시'가 유럽 제약산업의 중심지로

프랑스 파리에서 남동쪽으로 400㎞가량 떨어진 도시 리옹(Lyon)은 과거 실크로드의 종착지로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19세기 산업혁명 여파는 리옹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리옹에는 실업자와 빈집이 넘쳐났다.

리옹의 극적인 변화는 프랑스 지방분권형 개헌과 궤를 같이한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프랑스의 지방분권형 개혁은 2003년 개헌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를 통해 리옹은 강력한 지방조직을 구축했다. '지역의 문제는 지역이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다'는 슬로건 아래 재정자주권과 자치입법권 등을 손아귀에 넣었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거점산업과 도시재생사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오늘날 리옹은 프랑스의 명실상부한 제2의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중앙과 지방은 동등한 계약관계

도시 전체를 통째로 뒤바꾼 개헌의 힘을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지난달 15일 프랑스 리옹을 찾았다. 고딕풍 건물이 즐비한 파리와는 달리 리옹에서는 현대적 양식의 신축 건물 공사장이 지역경제의 역동성을 느끼게 했다.

메트로폴 리옹(La Metropole de Lyon)의 올리비에 니스 협의회장은 지방분권형 개헌을 통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방조직이 구축되면서 이 같은 변화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1982년 시작된 지방분권형 개헌은 30여 년간 좌파'우파 정권에 구애받지 않고 점진적이지만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 냈다. 중앙정부의 행정 및 재정통제 폐지, 재정자주권 및 자치입법권 획득, 지역의회 위상 강화 등이 변화의 핵심적 내용이다.

메트로폴은 강력한 지방자치 권력의 정수다. 대도시권 연합이란 뜻을 가진 메트로폴은 코뮌(우리의 읍'면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최소 행정구)에 분산됐던 지방권력의 한계를 극복, 글로벌 경쟁력을 육성하기 위해 2010년 12월 만들어진 조직 체계다. 지방분권형 개헌 이후 지자체가 거버넌스 형태로 협력할 수 있게 되면서 생긴 변화다.

메트로폴 리옹은 리옹시를 포함해 인근 59개 기초자치단체(코뮌과 코뮌협력체 등)를 포함한다. 코뮌 및 코뮌협력체에서 선출된 167명의 의원(6년에 한 번씩 주민투표로 선출)으로 구성된 메트로폴 리옹 의회는 리옹 권역에서 발생한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한다. 메트로폴에 주어진 권한과 책임이 막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메트로폴은 경제개발, 주거정책, 상하수도 관리, 장애인 및 실업자 문제 등을 중앙으로부터 일임받아 처리한다. 주민세를 직접 걷어 예산 배분도 자체적으로 한다. 메트로폴 리옹의 올리비에 니스 협의회장은 "때때로 실시하는 중앙정부와의 매칭사업 외에는 중앙정부가 개입하는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지자체 주도 경제육성과 도시재생

지방분권형 개헌을 통해 강력한 조직을 구축한 리옹은 2000년대 초반부터 지역을 대표할 경쟁거점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다. 실크 못지않게 제약산업이 유명했던 리옹은 '리옹바이오폴'(Lyonbiopole)이라는 혁신지구를 만들고 이곳에 기업과 연구기관'대학 등을 대거 유치했다. 그 결과 사노피 파스퇴르 등 세계적 위상을 갖춘 제약회사들이 리옹에 본사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올리비에 협의회장은 "프랑스의 경쟁거점산업 제도는 지자체와 기업'연구기관'대학 등이 주체가 되는 상향식 방식"이라며 "중앙정부는 큰 틀에서 이를 관장하기만 할 뿐 과제의 선정과 평가는 지자체와 기업이 직접 한다"고 말했다.

리옹은 지방분권 개헌 이후 성공적 도시재생산업을 통해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대거 유치하고 있다. 리옹은 지난 1998년 자체적으로 개발기본계획을 수립, 민간기업과 합작한 도심정비회사를 만든다. 실크산업의 중심지였던 수변지구, 이른바 '콩플뤼앙스' 지역의 쇠퇴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성매매가 성행하던 슬럼가는 1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유네스코가 정하는 창조도시에 선정될 정도로 눈부신 변화를 체험했다.

도시재생산업이 이처럼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지자체가 사업을 주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손강(Saone)을 따라 50㎞에 걸쳐 산재한 14개의 코뮌이 이 사업에 주체로 참여했고, 그 결과 주택'사무실'공공용지 등이 편중 현상없이 골고루 분산 배치됐다. 지자체가 힘을 모아 콩플뤼앙스에서 매년 연말 개최하는 '빛의 축제'는 프랑스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올리비에 협의회장은 "지방분권형 개헌 덕분에 파리 과밀화 문제에 공감하던 많은 프랑스인들이 리옹'마르세유'스트라스부르 등으로 터전을 옮겼고, 이들이 주는 활력 덕택에 지자체는 더욱 강력한 힘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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