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생기면 없애고 보는 대응
단기간에 가시적 결과의 압박
파괴보다 업데이트가 중요해
실패에서 배우는 경험도 소중
운동을 전공한 후배의 한탄을 들었다. 도장을 운영하면서도 대학 강사로 꾸준히 후학을 길러오던 그였다. 지난해 갑자기 8년이나 계속해 온 모 대학 수업이 폐강되었다고 한다. 전지훈련을 다녀온 국가대표 선수에게 과제물로 점수를 준 게 화근이었다. 그 전 학기에는 A+를 받을 정도로 성실한 학생이었다. 학교의 협조공문도 있었고 패스만 할 수 있는 C+ 학점을 주었다. 하지만 이른바 정유라 사태 와중에 징계를 받았고 수업도 폐지되어 버렸다. 공문도 소용없었다. 정유라 같은 악용 사례도 있기 때문에 체육 특기자 제도는 개선이 필요하다. 문제는 운용상의 개선을 넘어 폐지 등 극단적으로 가는 것이다. 이런 조치로 인해 김연아 같은 선수들은 더 이상 나올 수 없다는 게 그의 푸념이었다.
어디 이런 일들뿐인가. 문제가 생겼다 하면 없애고 보는 게 우리의 일차적인 대응이다. 나는 지난번 칼럼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어린 학생의 죽음에 여론도 들끓었다. 교육부를 중심으로 발 빠른 대책을 내놓았다. 현장실습 폐지. 참으로 단세포적인 발상이다. 현장실습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문제점을 면밀히 검토하고 상응하는 대책을 내놓는 게 바른 길이다. 당연히 시간과 노력이 든다. 당장 여론의 뭇매를 피하기 위해 없애버리는 것은 편의주의적 행정의 전형이다. 완전히 새로운 현장학습 틀을 만들려면 또 다른 시행착오를 얼마나 겪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모든 학생들을 줄 세우는 교육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일반 교육에 대한 투자와 관심의 절반만이라도 직업교육에 쏟아야 한다.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직업교육에 관심도 없고 투자도 하지 않은 정부가 내놓는 '폐기' 우선 정책은 구더기 무서워 아예 된장 독을 엎어 버리는 행태이다.
'축적의 시간'은 우리 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한동안 화제가 된 책이다. 우리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는 축적 경험의 부재라는 게 주된 지적이다. 빠른 성장과 단기 성과에 연연하여 지식과 경험의 축적이 진행될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마찬가지 행태를 보인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결과를 내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차분한 진단과 처방은 뒷전이다. 세월호 사고에 대처하지 못한 해경은 하루아침에 해체해 버린다. 정치에 개입한 국정원은 없애 버리고 새로운 정보기관을 만든다. 허투루 쓰인 특수활동비는 폐지하거나 대폭 깎아 버린다. 속 시원해 보이는 해결책이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돌고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면서 시간과 자원만 낭비한다. 해체와 부활을 오락가락하는 동안 해경은 달라진 게 없음을 최근 낚싯배 사고에서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구형 배는 야간 레이더가 없어서, 신형 배는 고장이 나서, 결국 민간어선으로 현장에 출동하는 소극을 연출한 것이다. 실패에서 배우는 경험을 축적할 시간이 없었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해체라는 충격요법 대신 세월호 사고 대응의 문제점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웠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보기관은 몸살을 앓는다. 사람을 처벌하고 쫓아내고 조직을 없애고 이름을 바꾸는 단기 작업에 몰두한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역량이 축적되기는커녕 훼손하는 길로만 가고 있다. 그동안 특수활동비 사용에 문제가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처벌도 필요하지만 철저한 사후 감시 등 제도적 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활비 예산을 수백억원 깎기만 하는 것은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조직도 돈도 해경 부활처럼 언젠가 슬그머니 부활할 가능성이 있다.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총론이 아닌 디테일을 감당할 역량을 축적해 나가야 한다. '축적의 시간'의 저자는 이제 파괴보다 업데이트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실정에 맞지 않거나 낡은 것을 현재의 상황이나 특정 환경에 맞도록 변경하거나 교체하는 게 업데이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몇 년도인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공허한 논쟁이다. 어떻게 하면 정부 차원에서도 축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지가 더 생산적인 논쟁이다. 기업 못지않게 정부도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
노동일 경희대 교수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이철우 "안보·입법·행정 모두 경험한 유일 후보…감동 서사로 기적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