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결국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제사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화약고에 스스로 불을 붙인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회견을 통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 선언하고, 후속 조치로 텔아비브에 있는 주(駐)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라는 명령도 내렸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독특한 성격을 무시하고 '이스라엘 땅'이라고 선언하자,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권은 물론 유엔, 유럽 등 국제사회는 일제히 반대에 나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70년 가까이 이어진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탈피한 것이어서 후유증이 간단치 않을 전망이다.
◆'친이스라엘' 행보, 그러나 이-팔 분쟁 해결사 자처?
트럼프 대통령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가운데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줬다.
또 예루살렘의 의미에 대해서도 "단지 3개 종교의 심장부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민주주의의 심장부"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기독'이슬람'유대교의 성지라는 성격보다는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또 "지난 70년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 그리고 모든 신앙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고 숭배할 수 있는 나라를 건설했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이-팔 양쪽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평화협정 촉진에 도움이 되도록 깊이 헌신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에 나서면서 가뜩이나 살얼음판인 이-팔 평화협정을 촉진하겠다는 것은 모순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이 선언이 수십 년째 미해결 상태로 지지부진한 중동 분쟁에 평화의 물꼬가 트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익명의 미 정부 고위 관계자는 ABC방송에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 더욱 광범위한 평화협정 달성에 더 이로울 수 있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즉, '협상의 대가'를 자처하는 그가 특유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단 팔레스타인을 거세게 궁지로 몰아붙인 뒤 거래를 시작해 팔레스타인의 양보를 얻어내는 방식으로 평화협정에 돌파구를 찾겠다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우방국들도 일제히 우려…중동서 美 외교 고립 자초하나
트럼프의 이율배반적인 행보는 자칫 무모한 승부수가 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당장 유럽의 우방국들부터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인정할 수 없다"며 유감을 표명했고, 보리스 존슨 영국 외무장관은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유럽연합(EU)의 페데리카 모게리니 외교안보 고위 대표도 '의미 있는 중동 평화 절차'를 강조하면서 "이런 노력을 해칠 어떤 행동도 절대 피해야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했다.
중동 지역은 이미 뇌관이 타들어 가는 분위기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는 "지옥의 문을 연 결정"이라고 경고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슬람 세계에 분노를 불러일으켜 평화의 토대를 폭파하고 새로운 긴장과 충돌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동 내 미국의 주요 동맹인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도 "극단주의를 조장하고 대(對)테러 전쟁을 약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긴급 성명을 통해 "예루살렘의 지위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협상에서 결정돼야 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곧바로 환영의 뜻을 밝힌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 세계가 한목소리로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한 셈이다.
이 때문에 중동 문제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해 온 미국의 입지를 약화하고 오히려 외교적 고립을 낳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존 브레넌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워싱턴포스트(WP)에 보낸 이메일 성명에서 "무모한 결정이자 역사적으로 큰 외교적 실수"라며 "앞으로 다가올 몇 년간 중동 내 미국의 이익을 크게 해칠 것이며 이 지역의 불안정성을 가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 ABC방송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사관 이전 약속이 당장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 방송은 "건설 부지 조사와 시공업체 선정, 공사 등을 하는 데 앞으로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결정의 낙진이 가라앉는 동안에 다른 나라들의 반응을 살피는 시간을 버는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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