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4일 오전 5시 30분쯤 대구시의회. 불 꺼진 본회의장에 손전등을 든 이들이 도둑고양이처럼 하나 둘 나타났다. 20분 만에 20여 명이 집결했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누구도 회의장 벽 조명 스위치를 켜지 않았다. 컴컴한 회의장 안에 촘촘히 모였지만, 속삭이는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민들이 잠든 새벽 남의 집 담을 넘어 장롱 서랍을 더듬는 밤손님과 다름없었다. 정족수가 채워지자 누군가가 본회의장 출입문을 잠갔다. 통 통 통!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의사봉 소리는 나지막했다. 그리고 시의회와 연결된 대구시청 쪽으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소식을 듣고 뒤늦게 본회의장에 도착한 기자는 소수 정당 당원들의 허탈한 표정만 마주할 수 있었다.
대구시의회는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의원 27명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 23명에게만 전날 본회의 일정을 알렸다. 열린우리당과 무소속 시의원 4명에게는 이날 오전 5시 31분 선거구 획정안 처리 일정을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민의를 도둑질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전날 경북도의회도 본회의장이 아닌 농정위원회 회의실에서 선거구 획정안을 기습 처리했다.
같은 달 28일 경남도의회는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쪼개는 안을 의회 주차장에 있던 버스 안에서 통과시키는 전무후무한 묘책을 성공시켰다.
대구시의회는 이어 2010년 4인 선거구 11곳을 모두 2인 선거구로 쪼갰고, 2014년에도 선거구획정위원회가 정한 4인 선거구 12곳을 모두 쪼개 2인 선거구로 날치기 통과시켰다.
대구경북 광역의원들은 묘안을 발휘해 선거구 획정안을 깔끔(?)하게 처리했지만, 이들은 사실상 자당 국회의원들의 꼭두각시놀음을 한 것이었다.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술'밥과 운전대를 책임져줄 시종을 원했고, 시종을 자처한 지방의원들은 윗분의 명령에 철저하고 치밀하게 순응한 셈이었다.
내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구시와 경북도는 최근 교수, 변호사, 기자, 시민'여성단체 회원,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 등 각계로 기초의원 선거구획정위원회를 꾸렸다. 유권자들이 투표로서 선거에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선거 규칙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유권자를 대변하는 선거구 획정 위원들은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하고, 유권자의 표 가치를 최대한 동등하게 만들어야 할 책무를 갖는다.
영남과 호남에서 그동안 축적돼온 지역주의는 양 지역에서 특정 정당의 지역 독점을 부추겼다. 1980년대 이후 민주주의 성숙에 따라 이제 지역주의를 완화하고 부숴버려야 할 시점에 다다랐다.
다양한 정치 세력의 지방의회 진출은 지역주의 타파는 물론 민주적 지방자치의 근원이기도 하다. 거대 정당의 일당 독점은 지역 발전을 가로막는 결정적 폐해가 된다는 점은 지난 40여 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입증됐다.
우리나라는 현행 규정상 광역의원은 선거구마다 1인씩 뽑는 소선거구제이고, 기초의원은 선거구마다 최소 2인에서 최대 4인까지 뽑는 중선거구제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대다수 4인 선거구를 2인 선거구로 쪼개기 한 결과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기초의원이 전체 의석의 98%를 차지하는 기형적 정치지형을 만들었다.
선거구 획정 위원들도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적 다양성 확보의 단초를 제공해야 할 책임을 일정부분 지고 있다.
후보 난립, 전문성 결여 등을 핑계로 소선거구제를 고집하는 거대 정당의 논리는 '어둠' '버스 안' '몰래' '날치기' 등 2인 선거구를 도둑질하듯 급조해온 행태 자체로 궁색하기 그지없다는 점을 방증했다.
조례 제'개정권을 가진 지방의회는 시민들을 대변하는 선거구 획정 위원들이 여론을 폭넓게 수렴하고 심사숙고해 정한 선거구 획정안을 손바닥 뒤집듯 뒤바꾸는 오만한 도둑 날치기를 이제 그만두기를 간곡히 당부 드린다. 공천권을 쥔 윗분의 눈치보다 유권자들의 준엄한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진정한 지방자치가 열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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