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를 맞은 지 20년이 되는 해다. 1997년 겨울에 시작된 외환위기는 한국사회 전체를 흔들었다. 의료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90년대 후반은 각종 첨단의료기기가 경쟁적으로 도입되던 시기였다. 특히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 등 고가의 의료장비가 도입됐고, 이를 운용할 영상의학과 전공의가 대폭 확충됐다. 1996년 진단방사선과로 불리던 영상의학과 전공의 정원은 275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1997년 겨울이 왔다.
의료 현장에서는 의료장비 수입이 전면 백지화됐다. 1달러당 800원었던 환율이 2천원 가까이 올랐다. 달러로 계약한 경우는 판매처에서, 원화로 계약한 경우는 병원 측이 위약금을 물고 계약을 취소했다. 금리가 연 20%에 육박하면서 빚을 내 의료기기를 도입하는 게 불가능했다.
매년 영상의학과 전공의가 275명씩 배출됐지만 갈 곳이 없었다. 전문의가 돼도 일자리가 없었고, 고가인 의료장비를 갖춰야 하는 개원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전공의와 비슷한 급여를 받는 전임의 제도가 생겼다. 이마저도 자리가 부족해 급여를 받지 않는 무급 전임의 제도까지 나타났다. 미래가 불투명하다 보니 수련을 아예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1년 차 전공의 275명 중 100명 이상이 수련을 포기했고, 4년을 견딘 전공의는 절반 정도인 145명에 불과했다. 전공의 지원자가 격감하면서 2000년에는 지원자가 45명으로 감소했다. 취업이 잘되지 않으니 영역 간 갈등도 심해졌다.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내시경에 도전했고, 내과 의사들도 초음파를 보기 시작했다. 2000년 의약 분업과 의사 파업 사태는 표면적으로는 의사와 약사 간의 갈등이었지만, 외환위기가 만든 의료시장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의 영향도 컸다.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병원들이 몸집 불리기에 돌입했고, 오랜 기간 전문의 배출이 부족했던 영상의학과 의사의 몸값이 치솟았다. 전공의 경쟁률도 덩달아 높아졌다. 급여 없이 진료하던 의사들도 교수가 되거나 개업의로 활동하게 됐다. 20년 동안 한 전문 분야의 흥망성쇠를 본 셈이다.
이 과정에서 얻은 첫 번째 교훈은 전문가로서 자존심이나 학문적인 영광 등은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는 한 줌의 먼지일 뿐이라는 점이었다. 소설 '오즈의 마법사'는 미국의 대공황 시기가 배경이라고 한다. 우리도 도로시와 같이 갑작스러운 외환위기의 돌풍을 맞은 후 한참을 헤맨 끝에야 제자리로 돌아왔거나, 돌아오는 중일 것이다. 동명 영화의 주제곡 'Somewhere over the rainbow'는 절망적 상황 위에 펼쳐진 무지개와 그 위에 있을 멋진 세계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다. 절망 끝에는 희망이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두 번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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