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미술관에서 잉카 쇼니바레의 '빅토리안 댄디의 다이어리'라는 작품을 감상하던 중 있었던 일이다. 때마침 열한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와 아이 엄마도 이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물었다. "작품에서 어떤 점이 독특해 보여?" 그림을 잠시 살펴본 후 아이는 "사람들이 모두 중앙에 있는 한 사람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엄마 마음에 찬 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재차 같은 질문을 했다. "다른 건 없어?" "음, 벽에 큰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어." 이번에도 엄마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나 보다. "잘 봐! 중간에 서 있는 저 사람 흑인이지? 이 그림의 작가가 흑인인데, 작가가 흑인이라서 흑인을 정중앙에 세운 거야. 원래 백인이 집주인인 편이 더 자연스러운데 여기선 흑인이 주인인 거야."
엄마의 설명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틀린 말은 없었다. 이 작품에 대한 이해는 엄마 설명대로 작품 정중앙에 선 사람이 흑인이자 이 작품을 만든 작가임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이런 구도를 통해 18세기에 타락했던 백인 댄디를 조롱하고, 흑인들은 부도덕하고 무능하다는 차별적 시선을 교정하고자 했다. 문제는 엄마의 설명이 의도와는 달리, 큰 저택의 주인은 백인인 것이 자연스럽지만 흑인은 그렇지 않다며 차별적 인식을 아이에게 가르친 셈이 됐다는 것이다. 아이가 작품 정중앙에 흑인이 서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의 특이한 점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에게 인종 차별적인 시선은 없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내 아이를 데리고 직업체험 테마파크에 갔다. 해충 박멸 체험이나 햄버거 만들기 체험보다 법복을 입고 판사가 된 아이의 모습에서 뭔가 모르게 더 흡족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나는 운전면허증을 따러 가겠다는 아이에게 "의사 체험은 어때?"라고 물었다. 아이는 관심 없다며 돌아섰다. 그제야 만사에 불필요한 의미를 부여해, 아이가 인간에 대한 편견을 갖게 하는 건 다름 아닌 부모인 나라는 걸 깨달았다. '어린왕자'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해.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들은 가장 긴요한 건 묻는 법이 없어. '그 애 목소리는 어때?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뭐야? 나비수집을 해?'라는 말을 어른들은 절대 하지 않아. '나이는 몇이야? 형제는?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라고 어른들은 물어. 어른들은 다 그런 거야."
나도 숫자를 좋아하는 그런 어른이 된 걸까?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사실이었던 것같이 의사, 법조인이 다른 직업에 비해 더 나은 대우와 존경을 받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무거운 현실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해서, 숫자가 지배하는 현실의 무게를 '옳은 것'인 양 착각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숫자를 조금은 미워하고, 현실도 조금은 밀어낼 줄 아는, 어른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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