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상화 고택과 석류나무

입력 2017-11-29 00:05:04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커지면서 산마다 울긋불긋 단풍 소식이다. 계절의 변화는 도시도 예외일 수 없어 초록으로 무성했던 가로수는 원색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대구의 대표 관광지 근대문화골목도 짧아진 햇살 아래 가을빛이 완연하고, 높다란 아파트 뒤 아늑하게 자리한 이상화 고택은 석류나무의 노란 잎과 붉은 열매로 절기의 변화를 알린다.

대구 중구 계산동 84번지 상화 고택은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을 시로 노래한 이상화 시인이 생을 마친 곳이다. 한때 낡은 도심을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뜻있는 많은 분이 힘을 모아 고택이 보존되고 있다. 골목길이 비좁을 정도로 방문객이 붐비는 것을 보면 관광명소를 넘어 민족정신의 성지라 해야 할 것이다.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 그의 수많은 시가 증명하듯 '민족시인' '저항시인'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닌다. 독립운동에 연관된 일로 투옥된 일도 여러 번이고, 일제의 강압 앞에 많은 문인이 변절의 길을 걸을 때도 오직 한 길을 걸어온 지조의 문인이었다. 살아생전 시집 하나 없었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으로 지금까지 존경받는 이유가 아닐까.

고택의 대문을 넘어서면 좁은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와 석류나무 두 그루가 자란다. 그중 석류 하나는 원래의 몸체는 삭아 내리고 곁순들이 크게 자라 지금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 앙상하고 생채기 많은 밑동은 한눈에도 풍상고초의 세월이 느껴지고, 이상화 시인의 고뇌를 지켜본 증인처럼 오랜 연륜을 짐작게 한다.

풍수를 따지고 금기가 많았던 옛 시절에는 집안에 심는 나무가 정해져 있었다. 장소와 방위에 따라 선호하는 나무와 꺼리는 나무를 구별하여 의기(宜忌)라 하였다. 나무마다 생태적 특성과 상징성을 고려하여 수종을 선택한 것이다.

석류는 집안에 허용되는 몇몇 수종 중의 하나였다. 하나의 열매 속에 수많은 씨앗을 보듬고 있어 자손이 번영하고 가문이 융성하는 나무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

또, 조선 초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인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식물의 품격을 '화목구품'으로 분류하였는데 석류는 그중 3품에 해당될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다.

그리고 영조 때의 선비 유박(柳璞)이 지은 화암수록(花庵隨錄)에도 벗이 될 만한 식물 28가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교우(嬌友)라 하여 아리따운 벗으로 상징할 정도로 인기있는 수종의 하나였다. 상화 고택의 석류도 이러한 뜻을 귀히 여겨 심겨지고 이제는 역사의 흔적이 되어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다.

찬바람이 불고 하늘이 높아지면서 벽돌 담장 넘어 석류도 빨갛게 익어간다. 잘 익은 열매의 갈라진 틈새로 넘쳐날 듯 꽉 찬 알맹이들이 붉은 루비처럼 영롱하다. 한 알 한 알 이상화 시인의 뜨거운 마음이고 민족의 독립을 염원한 기개일 것이다.

오늘도 도심 속 고택에는 어둡고 암울했던 시기 한 줄기 빛으로 살다간 시인의 높은 뜻을 들여다보는 방문객들로 분주하다.

이곳저곳, 이 방 저 방 기웃대는 그 마음에 마당의 석류나무 씨앗 하나 담아 갔으면 좋겠다. 한 알의 작은 씨앗이지만 물 주고 거름 주어 소중히 가꾸어 간다면 자손 번영의 상징처럼 상화의 민족정신도 대한민국 곳곳에서 피어나고 열매 맺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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