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대구, 음악창의도시?

입력 2017-11-27 00:05:01

"'그래 쓰것다, 너 소리 배워라.' 이 한마디는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말이었다."

박귀희 명창은 고향 경북 칠곡군 가산면을 떠나 8세 때 외가가 있는 대구 봉산동으로 옮겼다. 대구 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에 입학, 등'하굣길에 국악교습소 담을 타고 흘러나오는 소리에 끌려 소리를 따라 불렀다. 어느 날, 교습소 소리선생 손광재 앞에서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를 한 것이 인생의 갈 길을 결정짓게 됐다.(박귀희, '순풍에 돛달아라. 갈 길 바빠 돌아간다'에서)

또 다른 명창인 인간문화재 박록주도 고향(선산)에서 판소리를 배운 뒤 대구로 옮겨 소리 공부를 계속, 서울로 무대를 옮겼고 뒷날 서울에서 만난 박귀희를 가르쳤다. 두 사람은 대구를 발판으로 소리를 익혀 서울에 자리 잡아 전국을 무대로 국악 활동을 한 선구자 역할을 한 셈이다. 지금 구미시가 2000년부터 '명창 박록주 기념 전국 국악대전'과 칠곡군이 2012년부터 '향사 가야금병창 전국대회'를 열고 기릴 만하다.

대구는 조선 8도에서 가장 많은 고을과 풍부한 인적, 물적 자산을 간직한 경상도를 다스린 관찰사가 머문 경상감영이 위치했다. 조선 남부의 행정, 군사, 경제의 중심지였다. 한유신과 같은 풍류를 아는 가객(歌客)의 작품이 없을 수 없었고 판소리를 즐기는 '귀명창'도 숱한 탓에 기녀와 예인(藝人)의 행적도 많았다. 한말 국채보상운동에 거금을 내놓고 '대구 삼절(三絶)'로도 불린 염농산 앵무와 비취 자매가 그렇다.

이렇듯 대구는 우리의 소리와 음악인 국악과 인연이 오래인 남다른 곳이지만 지금은 남의 이야기나 다름없다. 전국 4곳에 국립국악원(서울'남원'진도'부산)이 마련되고 다른 곳이 전통 음악을 계승해 미래 문화자산으로 가치를 높이려 나설 즈음, 대구는 깜깜했다. 되레 대구는 서양 음악을 특화하고 차별하겠다는 '역발상'의 정책 개발에 바쁠 뿐이었다. 우리 것을 잊고 푸대접할 때 대구의 숱한 외국 음악 행사가 많은 돈과 관심 속에 생긴 까닭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 27일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유네스코가 선택한 대구' 기념음악회가 열린다. 국채보상운동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대구의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네트워크 가입을 축하하는 음악회다. 그런데 국악에 무관심한 대구시가 축하 공연 12건에 국악 3건을 넣은 일이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을 계기로 앞으로도 이런 신기한 일이 이어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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