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도를 사랑한다' '능으로 가는 길' 등 경주 곳곳을 소재로 한 산문과 '내 안의 깊은 계단'이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경주찬가'를 불러온 강석경 작가다. 그에게 마음속 안식처 한 곳을 꼽아달라고 했다. 경주의 모든 곳이 안식처인 그에게 어려운 부탁이었다.
"경주는 다른 나라의 오래된 도시와 다르다. 다른 나라에도 사찰, 유물이 다 있다. 그러나 경주에는 능이 있다. 1천500년 전 것들이다. 이젠 자연의 일부다.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곡선이다. 능을 통해 생(生)과 멸(滅)을 보게 된다."
둘레 1㎞ 정도, 느린 걸음으로 시작한 산책. 무열왕릉과 서악고분군 주변 한 바퀴다. 가을옷으로 갈아입은 선도산이 줄곧 눈에 들어온다. 작가가 이곳을 마음의 안식처로 꼽은 이유는 여기서 시작됐다.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가 서악(西岳)에서 오줌을 누자 서라벌이 잠기더라는 그 꿈의 서악이 선도산이었다. 그 꿈을 산 보희의 여동생 문희는 왕이 될 남자를 배필로 맞는다. 그 왕이 무열왕 김춘추다.
'지엄한 조선조라면 여자가 이런 꿈을 꿀 수 있겠는가.' 작가는 1천 년 전 고대의 꿈에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에게 힘찬 기운을 준 또 하나는 무열왕릉비였다.
"자유의 기운이 예술로 응축된 것이 무열왕릉비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 경주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느냐고 했더니 무열왕릉비를 꼽았다고 하지 않나. 받침대인 거북다리를 보면 삼국통일의 기운이 응축돼 있다."
비석 몸체가 없는, 분실의 기록임에도 작가가 에너지를 느꼈던 까닭은 눈으로도 보였다. 화강석으로 된 거북 모양 받침대는 불과 몇 년 전에 제작된 것처럼 싱싱했고 금방이라도 앞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 외려 울타리로 가둬 둔 것이 안심이 될 정도였다.
10년 경력의 문화재해설사는 "비수와 받침대만 있는 무열왕릉비는 비신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경주부윤과 퇴계 이황이 '비석이 닳아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내용의 편지가 기록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실제 경향신문은 '퇴계문집에 쓰러진 무열왕릉비 수습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1973년 보도한 바 있다.
무열왕릉을 지나 서악고분군 4기로 향하는 길은 선도산을 바라보게 돼 있었다. 서서히 높아지는 오르막이었다. 들숨이 깊어져도 가쁜 숨은 필요치 않았다. 주르르 늘어선 능들이 넓은 초원에 봉긋 솟은 언덕처럼 보였다.
"능을 보면 자신이 자유로운 유목민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는 작가의 말이 공감되기 시작할 즈음 15분간의 산책도 마무리됐다. 매일 이곳을 찾아 누운 채 일광욕을 즐긴다는 백구 한 마리가 늘어져라 낮잠을 즐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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