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
지난 3월 올해 첫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치른 고등학생들이라면 이 문구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시험 이후에도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이 구절은 이날 시험에 제시된 필적 확인용 문구였다. 필적 확인용 문구란 매 시험 시작 전 본인 확인을 위해 직접 자필로 쓰게 하는 짧은 글이다. 너무나 예쁜 글에 이날 시험을 치른 학생들 상당수가 울컥했다는 후일담도 들을 수 있었다. 이 문구는 박치성 시인의 시 '봄이에게'의 마지막 행에서 가져온 글이다.
'봄이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앞두고 불안함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청소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시이다. 조그만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리고 날리어 어느 낯선 땅에 이르게 될지라도, 긍정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것이라는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민들레 홀씨에게 앞날은 너무나 불투명하고 불안한 것이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도 없고, 무슨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 운이 없으면 흙이 아닌 물 위에 떨어져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내려가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단언한다. 저마다 이리저리 흩어져 떠돌며 부딪히게 될지라도 언젠가는 포근한 땅에 닿아 싹을 틔우고 잎을 피워 예쁜 꽃으로 자라나리라고.
지난 한 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전국 수험생들의 불안함과 걱정도 비슷했으리라. 시험을 단 하루 앞둔 예비소집일에 일어난 포항의 강진과, 뒤이어 나온 수능 1주일 연기 발표는 고3 수험생들을 대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지난 3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이날 하루만을 위해 살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시험인데, 하루아침에 연기라니. 일부 학생들은 홀가분한 마음에 그동안 공부하던 문제집, 참고서를 버리는 의식까지 치르지 않았던가. 시험이 끝나면 그동안 미뤄 두었던 여행을 가리라 항공권, 호텔도 예약해두었는데. 수능날과 생리 기간이 겹친 여학생들은 조절제까지 먹어 두었는데…. "왜 또 우리인가요!" 이렇게 외친 수험생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몇몇 매체에선 1999년생들의 수난사란 기사까지 만들어 내었다.
포항지역 수험생들이 겪어야 할 혼란은 더한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학생들은 체육관 대피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책을 펴야 했다. 눈으로야 책을 보고 있었지만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정신이 어수선한 데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여진까지 계속되니 무섭기도 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시험장이 바뀐 수험생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뜻하지 않은 마음고생도 심했던 것 같다. 수능 연기를 포항 탓으로 돌리려는 다른 지역 학생들의 곱지 못한 시선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울릉도 섬 지역에서 육지로 원정시험을 보러 온 학생들도 있었다. 34명의 울릉고 학생들은 보름씩이나 집을 떠나 포항 해병대에서 숙식하며 기다려야 했다.
초유의 사태였고 혼란도 있었지만 1주일의 시간은 흘렀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응원을 하고 싶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평정심을 되찾고 힘을 내라고, 그리고 오늘만은 여진이 없는 조용한 하루가 되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 외엔.
날씨가 추울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일부 지역에는 눈도 내릴 거란다. 아침밥을 든든히 챙겨 먹고 따뜻한 도시락도 잘 챙겨 가기를. 오늘은 지진도 잊고 부서진 집 걱정도 내려놓기를. 고사장으로 가는 길, 조용히 '봄이에게'를 되뇌어 보면 어떨까.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지 않을까.
민들레가 어디서든 잘 자랄 수 있는 건/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바람(風)에/ 기꺼이 몸을 실을 수 있는/ 용기를 가졌기 때문이겠지/ 어디서든 예쁜 민들레를 피워낼 수 있는 건/ 좋은 땅에 닿을 거라는 희망을 품었고/ 바람에서의 여행도 즐길 수 있는/ 긍정을 가졌기 때문일 거야/ 아직 작은 씨앗이기에/ 그리 조급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 불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머지않아 예쁜 꽃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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