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100주년, 혁명의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가다]<4>전쟁을 둘러싼 권력투쟁

입력 2017-11-18 00:05:04

300년 이어진 로마노프 왕조 무너뜨린 '2월 혁명'

타브리체스키 궁전은 러시아 두마(의회)로 기능을 했던 건물로 1917년 2월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타브리체스키 궁전은 러시아 두마(의회)로 기능을 했던 건물로 1917년 2월 혁명의 중심에 있었다.

취재를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머물 때 필자는 거주 등록을 위해 우체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우체국 바깥에 줄을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상황을 봐선 1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순서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다. 몇 명의 러시아 청년들이 시계를 보면서 줄에서 빠져나와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결국에는 필자도 포기하고 줄에서 빠져나왔다. 러시아에서 이런 모습은 아주 흔한 광경이다.

소비에트가 붕괴된 1991년에도 러시아 사람들은 빵을 사기 위해 매일 새벽부터 상점 앞에서 3시간씩을 기다려야 했다. 100년 전인 1917년의 혁명기에도 러시아 사람들은 빵과 설탕을 사기 위해 몇 시간씩 줄을 길게 늘어서야만 했다. 러시아에서는 혁명기를 겪을 때마다 사람들이 줄을 길게 늘어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마자 러시아는 참전을 선포한다. 차르의 참전 선언은 사실상 자신의 종말을 예고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물론 참전 초기에는 러시아의 승전을 기원하는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렸지만 사실상 러시아는 전쟁을 위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군의 부패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만연한 상태였다. 병사들에게 공급할 식량이나 물품은 이미 고갈된 상태여서 병사들은 굶주렸고 아예 군화조차도 신지 못하는 맨발의 병사들이 수두룩했다.

한편 차르 니콜라스 2세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러 수도를 1년 6개월 동안이나 비웠다. 명목상 권력은 황후 알렉산드라의 손에 있었지만, 배후에 있던 라스푸틴이라는 수도승이 사실상 모든 정책을 결정했다. 혼란과 무질서가 겨울궁전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을 강타했다. 1년 6개월 동안 무려 4명의 총리, 5명의 내무장관, 3명의 외무장관, 3명의 교통장관, 4명의 농업장관이 계속 바뀌어나갔다. 장관들에게는 자신들의 업무를 파악할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라스푸틴은 정적들에 의해 암살당했지만 차르가 돌아와서도 정부의 혼란과 무질서는 잡히지 않았다.

1917년에 접어들자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음식물 가격이 갑자기 4배로 뛰어올랐다. 곧 푸틸로프 공장의 2만 명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전쟁 중단을 내걸고 2월 18일부터 파업을 단행했다. 사흘 후에는 파업 노동자들이 10만 명으로 늘어났고, 세계 여성의 날인 2월 23일에는 50만 명으로 늘어났다. 총파업은 페테르부르크 전역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이에 차르는 군에 발포명령을 내렸고 발포로 인해 수백 명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두 주 동안의 총파업과 시위에서 1천300명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기간 군 내부에서도 동요가 일어나면서 발포명령을 거부한 병사들은 탈영병으로서 반정부 시위대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 주변의 많은 군부대들에서는 장교들이 병사들에 의해 체포당하거나 사살당했고 병사들은 무장한 채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자신이 심각한 상황에 처했음을 인지하지 못한 차르는 다시 전장으로 나갔고 두마(의회)의 해산까지 명했다.

그러나 혁명적인 상황을 감지한 두마 의원들은 차르의 해산 명령을 거부한 채 모여서 임시위원회를 구성한 뒤 도리어 차르의 퇴진을 요구하는 특사들을 보냈다. 3월 2일, 군부와 두마로부터 거부당한 차르 니콜라스 2세는 왕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300년 동안 이어져 왔던 로마노프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왕정을 대신해 두마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혁명 후 정치의 중심지였던 겨울궁전은 싸늘한 빈집으로 변해갔지만 두마의 건물인 타브리체스키 궁전에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임시정부는 레닌의 스승의 아들인 인권변호사 케렌스키가 이끌었으나 약체였다. 민중들의 조직을 기반으로 한 소비에트의 동의를 구해야만 정국을 운영할 수 있는 이중권력 체제였다. 임시정부는 행정 전반과 외교에서 통제력을 가졌지만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들과 군에 영향력을 가졌고 이들을 통제할 힘을 갖고 있었다.

차르 정부의 유산을 이어받은 임시정부는 연합군의 압력으로 인해 독일과의 전쟁을 포기할 수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수도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시민들이 음식물과 연료 부족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탈영한 많은 병사들도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노동자농민병사소비에트를 조직하기도 했다.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를 원하던 임시정부는 패전을 거듭하면서 대중적인 지지를 거의 상실해버렸다. 반면에 전쟁 반대를 당론으로 내걸고 캠페인을 벌였던 볼셰비키의 지지율은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에 의혹을 품고 있던 많은 민중들도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유럽에서 망명 중이던 혁명가들은 차르 체제가 무너진 2월 혁명 후부터 러시아로 속속 귀국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혁명적 상황에서 귀국하는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레닌을 비롯한 일행은 스위스에서 독일을 통해 봉인된 열차로 핀란드를 거쳐 4월 3일 밤에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 역에 도착했다. 레닌은 이곳으로 환영 나온 수백 명의 군중들 앞에서 평화와 빵, 토지를 연설하면서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당시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던 러시아 민중들에게 반전평화를 역설했던 레닌은 러시아를 구원할 구세주의 이미지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반면에 전쟁 중이던 적국 독일과의 평화를 외치던 레닌을 독일이 고용한 스파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필자는 100년 전 레닌이 귀국했던 장소인 핀란드 역을 방문했다. 레닌과 일행이 타고 왔던 봉인된 열차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핀란드 역 건물의 한쪽 구석 유리관 속에 전시된 채로 방문객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핀란드 역을 나서니 거대한 광장이 나왔다. 광장의 이름은 레닌광장으로 그곳에는 대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레닌의 동상이 위용을 과시하면서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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