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감사하는 존재

입력 2017-11-11 00:05:01

근래 호주 어느 언론에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화제가 되고 있다. 그녀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남편과 두 아들을 가진 부족함이 없었던 행복한 가정의 주부이다. 그런데 그녀가 뇌종양을 앓고 있고, 의사의 판정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생후 18개월 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중 자라거든 외국어 하나를 꼭 습득하여 세계와 소통하길 바라고, 운동을 하되 팀 운동을 하여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을 익힐 것을 권했고, 악기 하나는 꼭 배워서 문화생활을 누릴 것을 권했다. 그리고 더 자라면 여행을 자주 하면서 책에서 얻지 못하는 현장의 경험을 많이 쌓기를 권했고, 아버지에게 나중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면 아들들이 그 새엄마와 친하게 지내며 아빠의 행복을 세워주라고 편지에 남겼다. 그리고 끝으로 부탁하기를 말을 배우면서 다음 두 단어를 즐겨 사용하여 습관화하라고 부탁했다. 하나는 '부탁합니다'(please)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합니다'(thanks)였다. 뭐든지 혼자서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 '부탁합니다'를 말하여 겸손하게 살아가라고 당부했고, 도움을 받았을 때는 잊지 말고 '감사합니다'를 말하여 사람됨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 편지였다. 젊은 나이에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어린 아들에게 '감사합니다'를 가르친 여인은 진정 인간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세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란 명제를 통하여 서구 합리주의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이 명제에 생각 대신에 감사를 대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감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 존재는 감사함을 표현할 때 비로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영어 thank(감사)와 think(생각)는 동일한 어근에서 나왔다고 한다. 언어학적으로 맞는지 몰라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생각이 있는 자는 감사할 줄 알고, 감사는 생각에서 나온다고 본다. 생각이 인간 존재를 가치롭게 하고 의미 있게 한다면 감사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감사의 삶은 인간의 삶을 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미국의 정신을 추수감사절(Thanks Giving Day)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초기 미국 대륙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간 사람들이 동류들의 죽음과 낯선 땅의 외로움 속에서도 이듬해 추수감사절을 지냈다. 그 상황에서 감사절을 지낸다는 것은 정신이상자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감사절을 지냄으로써 그들은 도리어 슬픔을 이겨내었고 삶의 의지가 새로 정리되었고, 이웃들과 모여 나눈 감사절의 조촐한 식탁의 교제는 작은 행복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삶의 긍정성이 미국을 세워간 것이다. 자기 긍정성은 세계관이 건강해져 주변으로부터 돌격해오는 갖은 어려운 일들 앞에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감사의 긍정성은 주변의 존재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너그러움이 생긴다. 감사하는 마음의 크기만큼 그 안에 다른 존재들을 담아낸다. 그것이 자기를 키웠고 자신감으로 승화되어갔다.

오늘 우리 사회는 자신감을 잃어버린 것 같다. 청년들이 결혼을 미루고 있다. 취업하지 못한 이유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인 결혼을 포기한다. 전에는 취업을 못해도 둘이 사랑하면 결혼했다. 서로 믿었고 언젠가는 잘 살 것이란 희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삶의 긍정성이 청년들의 표지였다. 이 표지가 되살아나야 한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투쟁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변혁시켜 나간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더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성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고 했다. 인간을 향한 하늘과 땅의 보편적 진리가 실현되는 곳에서 천국이 보일 것이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