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삼신할매

입력 2017-11-09 00:05:00

어릴 적 우리 집에는 할머니가 두 분 계셨다. 한 분은 조모, 진짜 우리 할머니이시고 다른 한 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삼신할매다. 몸이 약한 나는 자주 배앓이를 하고 잔병치레를 했다. 그러면 할머니가 "내 손이 약손이다" 하시면서 배를 몇 번 쓱 쓰다듬으면 깨끗이 나았다. 그보다 좀 더 심하게 아프면, 이유 없이 축 늘어지거나 토하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뭘 잘못 먹었던지 누가 지질렀다며 삼신할매한테 싹싹 빌었다.

"영험하신 삼신할매 철없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했으니 어쨌든동 씻은 듯이 낫게 하시고 남의 눈에 꽃같이 보이게 하시고 초롱초롱 별님 같도록 하이소.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렇게 할머니의 보호 아래 한참 있다 보면 거짓말같이 벌떡 일어날 수가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집 안의 구석 어딘가에서 보이지 않게 삼신할매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다가 행여나 잘못한 일 있으면 벌주고 착한 일 하면 복을 주는 줄로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어머니가 넷째 딸을 낳으셨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할머니는 골목에 금줄을 치고 삼신상을 차려서 또 빌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게 하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때 며느리인 나의 어머니가 해산한 몸으로 일어나 삼신할매의 밥상을 걷어찼다. "삼신할매가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 어떻게 외동 며느리에게 네 번이나 연달아 딸을 잉태하게 하느냐"며 신에게 대들었다. 삼신할매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엄마는 손아래 시누이가 셋이나 있는 홀시어머니의 외동 며느리였다. 거기다가 내리 딸을 네 번이나 낳았으니 시쳇말로 칠거지악(?)에 해당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2년 후 어머니는 떡 두꺼비 같은 아들, 남동생을 연달아 낳았다.

엄마는 당신이 공평하지 못한 삼신할매한테 대들어 이겼기 때문에 아들을 낳았다고 늘 자랑 삼아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무시무시한, 조금만 잘못해도 벌을 주시는 삼신할매도 무서워하지 않고 당당하셨다. 아니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신은 공평하고 떳떳하면서 마음이 바르면 아무것에도 굴하지 않아도 된다고. 물론 어린 내게도 혼란이 왔다. 과연 삼신할매는 있는지? 삼신할매보다 우리 엄마가 더 힘이 세다는 쪽으로 믿음이 갔다.

삼신할매를 이긴 엄마는 딸이 많았지만, 아들 많은 옆집 타반댁보다 더 당당하고 큰소리쳤다. 여성의 시대가 오리라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셨는지 내게 옆집의 삼 형제 다 합쳐도 너 발가락만도 못하다고 나를 치켜세우며 내 간(뱃심)도 키우셨다. 유달리 당신을 쏙 빼닮은 나에게 우뚝 솟아 버티고 서 있는 앞산을 밀어 버리고 싶은 열정을 가지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셨다. 지금 내게는 삼신할매를 물리친 엄마가 계신다. 저 앞산을 밀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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