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천472건이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 조선통신사 기록물과 함께 지난달 3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국내 14번째이자 대구에서는 처음인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이번 등재는 국채보상운동이 1907년 일제 탄압 속에 좌절된 것과 달리, 일본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이뤄져 더욱 값지다. 국채보상운동의 뜻을 되살려 대구의 정신으로 삼아 새마을운동처럼 세계화할 만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강제로 나랏빚을 늘려 식민지화 정책을 편 탓에 부채가 1년 살림예산에 맞먹는 1천300만원에 이르자 1907년 2월 대구 사람들이 금연 등으로 돈을 모으면서 전국으로 펴졌다. 대구의 서상돈과 김광제 등이 앞장선 덕분이었다. 1천700만 국민의 25%인 400여만 명이 참여한 최초의 시민운동이자 국가 차원으로 번진 기부 문화운동이었다. 또 보수적인 대구에서 여성들이 앞장서 비녀와 반지를 내놓는 등 근대 여성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
국가 위기 속에 남녀노소 빈부귀천 구분이 없고 국내는 물론 미국, 중국, 러시아 등지의 동포와 외국인까지 동참한 국채보상운동은 비록 일제 탄압과 1910년 경술국치로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이어졌다. 바로 1997년 초유의 IMF 국가부도 위기를 맞아 들불처럼 번진 금 모으기'달러 모으기 운동 등으로 되살아난 일이다. 국채를 갚아 나라를 구하려는 국채보상운동이 90년 뒤 전 국민의 장롱 속 금'달러 모으기로 일궈낸 IMF 경제 위기 극복의 힘으로 되살아난 셈이다. 당시 세계인이 놀란 까닭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제국주의에 맞서 나랏빚을 갚으려 펼쳐졌다는 사실이 특히 높이 평가된 만큼 국채보상운동을 대구 정신으로 삼아 세계화해도 손색이 없음이 국제적으로 공인됐다. 오늘에 맞게 되살려 세계에 내놓는 일은 이제 우리 몫이다. 먼저 많은 국민과 지역민조차 잘 모르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홍보의 강화이다. 남북에 흩어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의 발굴, 학술대회 등의 조명도 필요하다. 관련 기록물의 보관, 유지 관리, 활용 등의 종합적인 체계 구축은 더욱 그렇다. 나아가 공동체의 삶과 유지를 기부문화로 이어지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 활용은 하기에 따라 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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